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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Apr 05. 2023

뒤라스를 기억하며

뒤라스와 바다의 풍경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녀와 첫 만남의 순간을 기억한다. 누군가 여름밤에는 뒤라스의 책과 함께해야 한다며 인스타에 추천을 했고 그 길로 곧장 <여름밤 열시 반>이라는 책을 샀다.


아주 간단한 책이었다. 책은 작았고 디자인은 심플했으며 문체의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쿨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어딘가 애잔했다. 그녀가 느끼는 슬픔이 깊이가 꽤 진함에도 불구하고 애써 냉정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나는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영화로 각색된 <연인>, <히로시마 내 사랑> 등을 읽으며 뒤라스에 완전히 빠지게 되었다. 뒤라스를 떠올리면 프랑수아즈 사강이 생각난다. 프랑스 특유의 섹시함. 형용할 수 없지만 사랑에 대한 지나치리만큼 진지한 갈구. 담배를 물고 타자기를 치는 뒤라스와 사강.  이 이미지는 내 삶을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늘 뒤라스가 되길 갈망했다.


많은 경험이 있진 않았지만 사랑에 대하여 지나치리만큼 깊이 생각하고 갈구했으며 모든 것을 글로 남기고싶었다. 아픔을 글로 치환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어찌 보면 글을 쓰는 사람에게 슬픔과 아픔은 잔인하지만 가장 쓸모 있는 글감일지도 모르겠다.


뒤라스의 사랑이 순탄하지 않았던 것처럼 뒤라스의 글 속 모든 여자들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끝나가는 사랑을 마주하면서 누군가를 구해주기도 하고 상처를 꽁꽁 덮고 있다가 마지막에 폭발적으로 울어내기도 한다. 뒤라스의 ‘그녀’들은 전부 헤어짐의 상처가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순탄히 사랑받으면서 끝나는 이가 없다. ‘그녀’들은 이별하고 사랑을 깨닫거나 새로운 사랑을 하면서도 이별한 사람을 떠올린다.



특별할 것은 없다. 사람마다 표현하는 정도가 다를 뿐이지 우리는 이별 앞에서 모두 이런 모습이다. 슬프게도 이별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무뎌지는 것뿐이다. ‘그녀’들처럼 우리는 이별하기 전,  딱 그 전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상처받은 채로 새로운 사랑을 선택하고 새로운 삶을 영위한다. 그 구멍은 영원히 비어진 셈이다. 그 구멍은 그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채울 수 없다. 그 사실을 안 채로 남은 삶을 살아야 하는 비극.


최근에 바닷가 가 하얀색 빈 껍데기 조개를 주운 적이 있다. 생의 나이테가 새겨진 조개껍질을 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부분은 아주 두꺼운 선이 있고 그 선을 넘어서는 층층이 얇은 선이  이어지기도 했는데 아마도 두꺼운 지점에서 큰 상처가 있었나 보다. 그걸 덮고 성장하다가 어느 순간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하니 애잔했다. 우리도 굵은 선, 얇은 선을 반복하면서 살다가 빈껍데기만 남기고 사라지겠지? 영혼은 어디로 간 걸까? 이 조개는 어떤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걸까? 조개를 버릴 수가 없어서 서울까지 데리고 왔다. 나라도 이 조개의 생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두꺼운 나이테 부분을 어루만지면서 인생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싶었다.


원래 이렇다는 것. 원래 이 모양이라는 것.



나에게는 어떤 강력하고도 굵은 나이테가 생길까? 나는 이 상처 이후에 어떤 선들을 만들어갈까? 발전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흔적이 남는다. 사실만이 오롯이 남는다는 건 참 애잔한 일이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바다는 그렇게 나의 사랑도 이별도 슬픔도 깨달음도 모두 지켜보고 있다. 유난히 올봄의 바다가 내게 그랬다. 언젠가 죽는다면, 죽음의 장소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나의 영광과 슬픔을 모두 비춘 바다 속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걸 늘 무서워했는데 무서운 만큼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피어났다.


생각해 보면 뒤라스의 <연인> 속 소녀도 바다에서 사랑을 시작하고 끝낸다. 그 영화를 수도 없이 본 것 같은데 끝끝내 사랑을 인정하지 않다가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사랑을 깨닫고 우는 소녀의 모습에서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을 느낀다. 그 슬픔은 해가 갈수록 더 진하게 느껴진다. 사랑은 어쩌면 이별의 순간에 드러나는지도 모르겠다. 바다는 나의 어떤 모습을, 소녀의 어떤 모습을 기억할까? 인생의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바다 나는 그 속에서 뒤라스를 떠올린다.


뒤라스의 시작도 바다였다. 베트남에서 태어났고 바다를 건너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녀가 가진 물성은 소설에서 빠지지 않고 드러난다. 어떤 경우라도 그녀의 소설에 물이 없었던 적은 없다. 바다가 있고 강이 있고 그것을 비추는 풍경이 있다. 그리고 헤어짐이 있다. 작가에게 물이 라는 애잔한 풍경이 없다면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사랑이 촌스러워진 시대에도 지독하게 헤어짐을 통해 사랑을 그린 뒤라스를 존경한다. 영화로 까지 뻗힌 그녀의 창작욕도 나이가 들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랑이라는 감정도. 빈 조개껍질을 아침에 어루만진 것처럼 그녀의 인생을 살포시 어루만지면서 지금의 나를 살펴본다. 많은 것이 지나가버린  지금의 나에게 뒤라스는 가장 적절한 위로일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비로소 뒤라스를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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