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자란 느낌

by 이시현

블로그를 정리하다가 '시현'이라는 이름을 발굴해냈다. 운명은 이런 것일까. 결국에 돌고 돌아 나도 모르게 미래의 이름을 과거에 쓰고 있었다. 그 소설은 어디쯤에서 끝냈더라. 아이디어 발굴 단계였고 시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고자 했다.

2025년의 시현도 마찬가지다. 블로그에 쓰인 옛 일기들을 보면서 오늘의 나를 보고 있다. 과거의 나는 훨씬 더 영혼과 교감하고 있었다. 그때는 관계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몰두할 때라 스쳐 지나가는 바람도 가벼이 여긴 적 없다. 모든 자연에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항상 무언가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꿈을 이루겠다는 집념으로 수도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그때의 글은 진실되고 풍부하다.

2019년 당시에는 시를 많이 썼었다. 시인지, 일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시라고 명명하면서 50여 편을 넘게 쓰고 신춘문예에 낸 적도 있다. 당선 여부를 떠나서 묵직한 A4용지를 두둑이 잡고 봉투에 넣을 때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그로부터 5년 후, 나는 중단편 소설을 써서 또 신춘문예에 냈다. 결과는 늘 똑같지만 나에겐 무언가를 두둑이 뽑아낼 수 있는 글이 뭉터기로 있다는 자체가 좋다.

다만, 요즘은 영적이지도 않고 자연과 교감하지도 못해서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오랜 직업활동으로 글이 건조해졌다는 생각도 한다. 대체로 내가 쓰는 의견서와 서면은 명확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군더더기 없는 방향을 지향한다. 쓸데없는 말은 쓰지 않는 게 전략이기도 하다.

문학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조금 더 많은 게 표현되어야 표현되지 않을 것들이 추려진다. 나는 지금 회피하고 있지 않는가. 부담스러울 바에 차라리 표현하지 않기로 말이다. 부끄러움을 직면하지 못하면 글은 나아지지 않는다.

재작년부터 몰두하던 소설은 이탈리아가 배경인데, 여행을 다녀와서도 아직 적지 못했다. 그 지역의 풍광들을 담아서 쓰는 게 목표였는데 24년에 쓴 경장 편 소설을 다듬는다는 핑계로 기억 저편에 치워두었다. 하지만 가끔씩 튀어나온다. 해야 할 숙제를 시간을 허비하느라 하지 못하는 찝찝함이 든다.

언제쯤 글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을까. 가장 사랑하기에 자본주의와 성과주의에 물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완성되지 않은 채로 세월을 보낸다는 건 썩 유쾌하지 않다. 순수한 열정을 유지하려면 약간의 발전은 스스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문장력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단어는 쓰는 단어만 쓰고 있고 문장은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는다. '나'라고 시작하는 문장은 또 왜 그렇게 많은가. 연기를 하고 시나리오 작법을 배우면서 나는 왜 이렇게 남에게 관심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지나치게 '나'에 대해 몰두하는 성향은 2019년부터 2025년까지 변함이 없다. 오로지 나를 위한 사색, 나를 발견하기 위한 지독한 탐구.

가끔은 사람들이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할 때 당황스럽다. 내 모든 시간과 여지껏의 일생은 오로지 '나'를 알기 위해 쓰였기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어려워할 때 어떤 마음을 건네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이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도 자신 없다.

나는 '나'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지만 덕분에 우울하고 자존감이 낮으며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가끔은 모든 걸 놓고 싶다. 온종일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지치지 않고 토론하는 느낌이다. 무엇이 낫다고 할 순 없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쓴다. 내 글의 원천은 처음부터 일기였고 일기에서부터 시, 시나리오, 소설, 에세이 등이 파생된다. 시간과 체력이 된다면 더 많이 쓰고 싶다. 글을 쓸 때 가장 자유로운 기분이 든다.

뜬금없지만 이런 내가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요즘 들어 영 자신이 없다. 구속되는 기분이 들면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회사에서도 답답하면 무작정 뛰쳐나가서 걷는다. 바람을 쐬고 햇빛을 쬐며 못 뒤에서부터 올라온 스트레스를 겨우 진정시킨다. 누군가 통제하려 들고 상황이 나를 제어한다는 생각이 들면 돌발 행동이 발현된다 금쪽이가 따로 없다. 도무지 '넵'이 그냥 나오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부터 앓았던 고질병이다.

나 같은 사람이 회사에 다니고 보수적인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는 게 맞을까? 요즘은 근본적인 질문부터 다시 점검해 본다. 잘 모르겠다. 여러모로 가슴속 깊은 곳이 회색깔로 변모한다. 19년의 나는 기대란 게 있었다면 25년의 나는 기대를 무너뜨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공기를 쐬고 싶고, 그 공기가 나를 바꾸리라는 기대는 버리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숨 쉴 구멍을 만들어왔지만 올해는 처음으로 커리어 발전저인 여행을 다녀와보고자 한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더 넓은 세계에서(예전엔 죽어도 가기 싫었던 유학이었지만) 공부를 하고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은 한국이 너무 작은 것 같다. 삶의 방식도 정형화되어 있고 기회도 제한되어 있다.

무엇보다 내가 하는 자유로운 생각들을 해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결혼적령기에 와 있다 보니 그런 타이트한 기준을 더욱더 체감한다. 이곳에선 틈이 없다. 결혼에는 자비가 없고 다양한 삶은 아이를 낳으면 자주 거세된다.

언제나 외국이 답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바람을 조금 더 허파에 넣고 돌아오고 싶다. 지금 이 시기를 결혼적령기라고 하기보다는 도전적령기라고 명명하고 싶다(그렇다고 영영 결혼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큰 부담을 느끼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결혼을 해야 해서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 때 인생에 큰 결정을 하고 싶다. 급하지만 급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함이다. 내 삶과 상대방의 삶이 함께 했을 때도 지속 가능하다면 그때 진정으로 결합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없다고 했지만 여전히 기대가 있나 보다.

역시나 완전한 포기는 어렵고 수양의 길은 멀고 험하다.

하지만 꿈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난 또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는 가볍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