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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지언니 Apr 01. 2020

정크스페이스 바이러스에 감염되다!

<북리뷰> ­정크 스페이스 | 미래 도시 /  문학과지성사


“스페이스 정크 space-junk가 우주에 버린 인간의 쓰레기라면, 정크 스페이스 junk-space는 지구에 남겨둔 인류의 찌꺼기다. 근대화가 건설한 생산물은 근대 건축이 아니라 정크 스페이스다”


바이러스처럼 한동안 잠복해 있어 처음에는 알아볼 수 없는 정크 스페이스! 이 바이러스는 2000 초반에 언급되었고 그 이후 지구 전체를 덮을 만큼 증식을 했습니다. 물론 코로나 19 같은 바이러스는 아닙니다. 정크 스페이스는 "쇼핑 안내서"(2002년)에 수록된 램 콜하스의 글에서 탄생한 신조어입니다. 일주일 전에 서점에 들렀다가 문학과지성사 채석장 시리즈로 나온 이 책을 보게 되었는데요. “논쟁적인 주장을 펼치는 정치·사회·예술 에세이 혹은 작가들의 사유가 담긴 편지, 메모, 일기 등을 소개” 하는 시리즈로 두껍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도 이런 내용으로 시리즈를 만드는구나 내심 신기해하면서 얇으니까 금방 읽겠지 하면서 책을 샀지만, 웬걸요 언어의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난 예전에 저널리스트였다. 내 열정의 원천은 그저 어마어마한 호기심이다. 어떤 사건 이면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자세,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2014년 램 콜하스의 방한 인터뷰




램 콜하스의 글은 형식을 파괴한 신랄한 문장과 도발적인 대토를 겸비한 명저라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완독 하기 참 어렵습니다. 14페이지에 빼곡하게 적은 문장들은 글의 편집 자체에서도 방향 상실과 과잉의 현대적 풍경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는데요. 지금까지 저는 이 글을 소제목도 문단도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쓴 정크 같은^^글이라고 자세히 읽어볼 엄두를 못 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20년 전 예언 같은 그의 암호 말에서 나온 통찰력에 핵소름도 느껴지고, 그는 건축이론 분야뿐 아니라 저널리스트로서의 팩트 탐구 정신과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건축 언어를 찾아낸 동시대 최고 건축가로 평가받는 이유를 새삼 알겠더라고요. 물론 번역본으로 읽고 나서요^^



“토끼는 새로운 소고기”라는 문장에서 시작해 “성형은 새로운 우주다”로 종결되는 너와 나의 암호 말



정크 스페이스는 직역하면 쓰레기 공간이겠죠. 하지만 음식으로 치자면 정크푸드와 같이 인스턴트식품으로 생각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열량은 높지만 영양소는 부족한 식품 같은 것...... 양적인 부분에서 도시의 많은 시설을 차지하고 있고 실제로 도시를 작동하게 만드는 공간이지만,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공간? 트렌드란 복병에 용도 폐기되어 변화의 급물살을 맞은 공간? 정크푸드처럼 쉽게 먹을 수 있지만 허겁지겁 먹고 나면 크게 맛도 기억나지 않는 음식처럼.... 이런 공간들 어쩌면 쇼핑몰, 테마파크, 주유소, 무빙워크, 지하철역과 공항 같은 지나가면서 사용하고 쉽게 사라지고 대체되는 공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흔히 말하는 상업화된 공간이랄까요.




정크 스페이스, 꽂힌 문장들



근대화가 진행된 이후에 남겨진 것,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응고된 것, 혹은 근대화의 낙진


이것의 개별 부분들은 기발한 발명의 결과물로서, 인간의 지성에 의해서 명료하게 설계되고, 면밀한 계산을 통해 추진되었으나, 그 모든 것의 총합은 결국 계몽주의를 종식시킴과 동시에 하급 연옥과 같은 소극으로 부활


이것은 우리가 이루어낸 모든 것의 총합으로 우리는 이전 세대가 지금까지 건설했던 모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세워놓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수준에 이르지 못함 (우리는 피라미드를 후세에게 남겨주지 못한 것과 같음)


새로 나온 추함의 복음서에 따르면, 20세기에 물려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크 스페이스가 21세기에 들어 건설되고 있음 (20세기를 위한 근대 건축을 발명한 것은 실수였고, 20세기의 건축은 실종)


이것은 돌연변이로 에스컬레이터와 에어컨디셔너가 만나 석고판 인큐베이터 속에서 잉태된 것으로 이것의 핵심은 연속성으로 확장을 가능케 하는 모든 발명품을 착취하며 이음매도 없는 매끈한 하부구조를 만들어 냄


건축가들의 신비화에 대한 우리의 응징


과도하게 익었지만 영양가가 없음


공공연한 신격화, 공간적 웅장함, 이 풍요로움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공허함이며, 건물의 신뢰성을 체계적으로 잠식하는 야망에 대한 악질적 패러디


이것의 도상은 13퍼센트가 로마 양식이고, 8퍼센트는 바우하우스 양식, 7퍼센트는 디즈니 양식, 3퍼센트는 아르누보이며, 마야 양식이 그 뒤를 쫓고 있음. 허위와 가상 질서의 영역이며 모핑의 왕국


측량이 불가능하며, 약호화 되지 않음. 파악될 수 없는 것이기에 기억될 수도 없음. 완벽함을 창조하는 척하지 않음 단지 흥미를 유발 시킴


이것의 벽은 명품 브랜드 전시장으로 설계


이것은 디자인에 기생하여 번성


이것을 처음 생각해낸 건축가들은 이를 메가 스트럭처라 칭하며, 자신들이 봉착했던 난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종 해결책이라 여김


이것의 프로그램은 점직적으로 확대되며, 이것은 끝없이 이어짐


이곳 어디를 가든 다양한 종류의 의자들이 있음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공간에 대한 경험이 그 이전의 그 어떤 공간에 대한 감각적 경험보다 훨씬 더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함


이 곳은 아주 강렬하게 소비되는 까닭에 아주 정열적으로 유지 보수됨. 끊임없는 반복 재생을 통해 밤 시간은 낮 시간 동안 받은 상처를 치유함


정크 시그니쳐는 새로운 건축. 복원하다 restore,  재배치하다 rearrange, 재조립하다 reassemble,  개조하다 revamp, 혁신하다 renovate,  수정하다 revise, 회복하다 recover, 재디자인하다 redesign, 반환하다 return, 다시 하다 redo, 존중하다 respect, 임대하다 rent 접두사 re로 시작하는 동사는 이것을 양산


정치적. 안락과 쾌락의 이름으로 우리의 비판적 능력을 제거함으로써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


이것은 우리의 모든 감정을, 우리의 모든 욕망을 알고 있음


기업의 자연적 성장을 통해 발생함. 시장의 자유로운 놀이의 산물


이것은 생명력이 약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프로그램을 집어삼켜야만 함


이것은 진정성을 가지고 있음을 애써 과장






의도한 스무고개는 아니었지만, 정크 스페이스의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모습을 읽어보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다 보면 요즘 건축가들이 하는 일에 팔 할은 정크 스페이스를 만드는 것인가 하고 의문의 일패를 당하게 되죠. 건축가의 전통적인 오리지널리티를 생각하면 이런 상업화된 공간들은 바라볼 때 정크 스페이스라고 말할 수도 있겠구나 동의하게 되지만, 여전히 찜찜한 여운이 남습니다. 공간은 건축가만이 가지는 특권적 언어이자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20년 후 현재. 정크 스페이스는 과잉 공급되었으며 생존을 위한 변화가 한창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의 예로 공유경제를 기반으로 실사용자들은 새롭게 공간을 소비하는 방식들을 보여 주며  팝업스토어, 코워킹 스페이스 등 전통적인 공급자 중심의 시장을 무너뜨리기 시작했어요.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변덕스럽게 바뀌어가는 공간들이 생겨나며 건축이란 영역보다는 공간 비즈니스로 변모하며 발전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이런 불편한 진실을 예견한 찜찜한 책.

이 기분을 함께 나누고 싶으시면 꼭 읽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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