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이 곳에 답사를 갔었다. 가물거리는 기억에 인터넷 뒷조사를 조금 보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알 프레시네는 1927년 창고 용도로 지어졌다. 그 당시 역과 연결되어 철도 수화물을 저장하고, 근처 밀가루 공장의 창고로도 쓰였다고 들었다. 실내 깊숙이는 아니었지만 레일이 깔려 있었고 기차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게 설계되어 있었다. 오벙(Auvent)이라 불리는 바람에 펄럭일 것 같은 곡선 캐노피는 유려했다. 콘크리트로 얇고 길게 뽑았는데 처음 봤을 때 참 인상적이었다. 산업 건축물에서 보기 힘든 고퀄 디테일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수화물을 실은 기차와 화물차가 빈번히 드나들던 창고였기 때문에 피지컬도 남달랐다. 에펠탑을 눕힌 크기인 길이와 같은 310미터, 너비 72미터, 면적은 22,000㎡에 달한다. 그 당시 혁신적으로 프리스트레스 콘크리트로 지어져 건축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산업유산이 되었다. 알 프레시네도 철도 산업의 쇠퇴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산업이 바뀌면서 창고의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1990년에는 철거의 위기까지 맞게 되었다.
유럽이던 한국이던 산업화 시대의 건축물을 다시 사용하는 것에 관심이 많고, 대부분 문화적 변용을 꿈꾸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알 프레시네는 산업 건축물이 다시 산업 건축물?로 재사용되는 곳이다. 산업의 형태만 바뀌었다. 2차 산업시대에서 4차 산업시대의 건물로 재탄생한 격이라 말해도 될까? 이 철도 수화물 창고는 STATION F로, 4차 산업혁명시대 글로벌 스타트업 캠퍼스로 다시 사용된다.
2. 유럽의 실리콘밸리
"앞으로 프랑스는 스타트업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단언컨대 프랑스는 창업가들을 위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가장 창의적인 환경을 조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가 이런 변화의 플랫폼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지금 프랑스에 투자하십시오."
2017년 6월 15일 비바 테크놀로지에 참석한 마크롱 대통령 연설 중
스테이션 F는 스타트업을 위한 생태계 공간을 조성하는데 초점을 맞춰 개발된 곳이다. 프랑스 통신사 프리(FREE)의 창업자 자비에르 니엘 (Zavier Niel)이란 재력가에 의해 2억 5000만 유로를 투자하여 만든 스타트업 캠퍼스다. 그는 이미 에콜 42란 사설 코딩 학교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스타트업 캠퍼스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밑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유럽의 스타트업 허브로 도약하고 싶은 프랑스 정부의 프렌치 테크 정책과 검증된 민간 중심 스타트업 생태계를 기반으로 자금을 더해 줄 투자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민관 합작품이다. 설계는 Wilmotte & Associés Architects가 2년간의 작업을 수행한 후 2017 년 6월에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1000개의 스타트업이 3000곳 이상의 업무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 심사를 통해 입주 기업으로 선정되면 월 195유로 (약 25만 원)을 내고 이용할 수 있다. 레스토랑과 카페 바 등도 입주해 있어 하나의 공간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하다. 패스트 파이브의 라이프, 헤이 그라운드의 디웰 하우스처럼 13구 근처에 600명의 창업자들을 위한 코리빙도 짓고 있다. (코리빙이 완성되면 다음에 이야기를 또 이어 가겠다.) 창업과 정착을 위한 오피스와 주거뿐 아니라 행정 지원과 교육,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것이 자생적 창업 생태계를 만들어가는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https://stationf.co/
3. 공간 구성과 운영
스테이션 F는 셰어 (SHARE) 크리에이트(CREATE) 칠 (CHILL)등 세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300미터가 넘는 건물을 세 도막으로 나눠 두 곳의 공공보행로를 만들었다. 공공보행로는 건물로 인해 단절될 수 있는 도시의 흐름 잘 이어받은 도시적 장치이기도 하다.
매경에서 천의영 교수님이 쓰신 유럽의 실리콘밸리 꿈꾸는 `파리 스테이션 F`칼럼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보다 더 잘 정리할 순 없을 것 같아 그대로 붙여본다. 미래를 지향하는 새로운 공간 플랫폼의 공간적 성격과 운영 특성을 세 가지로 정리해 주셨다.
첫째, 공간 체험과 운영 자체가 시대정신의 `새로운 생성 방식(new modes of production)`을 담는 것이어야 한다. 이 공간은 많은 사람이 방문하며 새로운 공간 플랫폼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이들의 상호 자극과 참여가 또다시 새로운 발상의 근원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피어 러닝(peer to peer learning)`과 `프로젝트 베이스 러닝(project based learning)`을 통해 뜻밖의 협력을 유도하는 공간 엔진장치를 형성해야 한다. 다양한 혁신 사고의 출발점이 이곳에 모여들고 이를 통해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의 출발점을 공유하게 하는 곳이어야 한다.
셋째, 지역과 계층 사다리 역할로 지역적, 경제적, 학연이라는 장벽 없이 크라우드 소싱을 통해 새로운 인력의 발굴이나 조직화를 지원하고, 기존의 구조화된 사고 바깥의 새로운 생각을 과감하게 포용하는 곳이어야 한다.
SHARE ZONE
셰어 존에서는 스타트업 구성원들이 다양한 이벤트를 열거나 외부인과 만날 수 있다. 대문사진으로 올린 비바 테크놀로지에 참석한 마크롱 대통령이 연설했던 그곳이다. 외부에서는 새로운 기술을 일반인에게 소개하고 시연하는 행사로 늘 북적거리지만, 입구부터는 경비가 삼엄하고 셰어 존에는 초청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곳은 어떤 사람들이 방문하는지, 어떤 행사를 하는 곳인지 전면 외부공간과 공공보행로에서 유리창으로 볼 수 있는 투명한 곳이다.
https://stationf.co/ 외부에서 본 셰어 존 입면
https://stationf.co/ 셰어 존에서 행사
https://stationf.co/
CREATE ZONE
스타트업을 위한 프로그램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곳이다. 대표적으로 페이스북의 스타트업 개러지(Stratup Garage), 프랑스 최대 인터넷 쇼핑 업체 방트 프리베(Vente-privee)의 임펄스(Impulse) 네이버의 스페이스 그린 등이 있다. 스타트업이 이들 글로벌 기업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인큐베이팅되는 곳이다. 공간 구성을 보면 협업을 하는 탁 트인 공간에 만들어진 개방된 코워킹 스페이스도 있지만, 소음과 시선으로 보호되는 숨기 좋게 만들어진 재미있는 공간들도 보인다.
https://stationf.co/ 크리에이트 존
https://stationf.co/ 모여서 토론하고 함께 일하지만 조용히 집중하고 쉴 수도 있는 곳
https://stationf.co/ 중간에 있는 공공보행로
CHILL ZONE
모두에게 개방된 곳으로 유일하게 들어가 본 곳이다. 레스토랑과 카페 바가 있는 파리에서 만나기 드문 공간으로, 푸드코드보다는 셀렉 다이닝에 가까운 복합 식음공간이다. Big Mamma그룹의 초대형 바이자 카페 레스토랑인 La Felicità가 있다. 분위기는 기차가 들어오던 과거의 모습을 재현했다. 이런 분위기를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할지..... 얼마 전에 갔을 때에는 외부 테라스에까지 테이블을 놓고 사람들로 넘쳤다.관광이나 여행 중에 들러도 좋을 것 같은 곳이다. 하우스 인 하우스처럼 대 공간 안에 만들어진 북카페와 기괴한 화장실을 꼭 들러보길 추천드린다.
사실 이 곳은 십 년 전쯤 MASTER 1 첫 학기 설계 부지였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관심도 많았다. 나는 이 곳이 이렇게 창의적인 프로그램과 도발적 상상력을 담은 곳으로 재탄생할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 지금 10년 후의 세상이 이렇게 변할 줄 꿈에도 몰랐다.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때 그 폐허의 창고가 여러모로 반짝이는 곳이 되어 기뻤다.
https://stationf.co/ 파리 복합 식음공간?
https://stationf.co/ 입구
실리콘밸리 엔지니어와 벤처 투자자 만 명만 다른 도시로 이주시키면 그 도시가 실리콘밸리가 된다.
실리콘 밸리의 대표적 투자자 폴 그레이엄이 한 말이다. 스테이션 F를 벤치마킹하여 인천 송도에 한국판 스테이션 F가, 천안·아산역 유휴공간에 C-스테이션이 들어선다는 뉴스를 보았다. 엔지니어 창의 계층이 모이는 도시를 맨땅에? 잘 만드는 것도 어려운데, 투자자가 모일 만큼의 매력적인 도시가 되기까지 얼만큼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까? 그러려면 무엇을 더 갖춰야 할까? 엔지니어와 투자자가 함께 움직이고 공존하는 화려하고 트렌디한 지성의 도시가 되려면......
여하튼 파리는 예술과 문화의 중심이지만 신산업과 기술의 중심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컸는데 이 곳에 오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이 곳에서 젊은 대통령만큼이나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스타트업의 생태계를 느껴 보면 좋겠다. (그리고 지자체들이 제대로 벤치마킹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