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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yodad Feb 28. 2019

쉬어가는 방법

2019 월간 작작 2월 - 쉼



후... 잠깐 좀 쉬자.

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지난하고 긴 과정' 또는 '육체적인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 것 같은데, 아마도 기억하기로는 6살 때부터 였던 것 같다. 그 이전의 시기에야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도 되던 삶이었는데 생각이라는 게 어렴풋하게 생기기 시작하고, 한정된 어휘로 나마 말을 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쉼'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부모님과 대공원을 한참 거닐거나, 할머니를 따라 시장을 가다가, 서울의 친척 결혼식을 다녀왔던 경우 등등 이 쉼을 필요로 했던 순간들이었다. 그 시절의 쉼은 육체적인 피로를 푸는 과정에 한정되어 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야말로 가만히 앉아서 TV를 보거나 누워있다가 어스름하게 잠이 들면서  '쉬면' 쉬어졌다.


하지만 중학교 이후로는 그런 쉼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 비평준화 지역이었던 탓에 중학교 때부터 입시 공부에 시달리고, 대입 이후로는 문과생의 숙명인 무엇을 먹고살지에 골몰하며 가만히 앉아 있어도, 누워있어도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며 잠을 잘 때 외에는 온전히 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20대 중반까지 학원 강사를 하면서 임고를 준비하다가 뒤늦게 군대를 갔다. 


치파오와 마네킹

군대에서도 20대 특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끊임없이 들었지만, 장교로 군생활을 했던 탓에 얼마간의 월급과 자유시간이 생겨 어느새 그 시간들을 즐기고 있었다. 비록 근무는 3교대라 매일 밤낮이 바뀌고 있는 생활이었지만, 야간 근무 끝나고 동기들과 치킨(힐링 푸드 치킨!)을 먹거나, 부대 밖 주변이 변해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아침에 퇴근해 잠잘 시간을 쪼개 2시간씩 전철을 타고 필름을 현상하러 충무로에 나들이를 가거나 하는 일들을 하면서 '쉬었다'. 비록 몸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이것이 쉼이 될 수 있음을 처음 배웠다. 그전에는 바쁘고 정신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에 쉼이 없다면 더 깊이 있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 많이 찍고, 더 많이 걸으며 주변을 관찰하고 쉬려고 애썼다. 



대학교를 서울로 다녔지만, 남산과 명동에 제대로 가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전에는 스치든 지나치거나, 잠깐 약속 장소로 갔을 뿐 제대로 그곳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즈음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던 것 같다. 게다가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찍은 사진을 확인하려면 한주 혹은 한 달은 훌쩍 지난 이후였다. 그러다 보면 계절이 지나가 버리기도 하고, 아직도 냉장고에서 미지의 이미지를 품은 채 잠들어 있는 사진들도 있다. 덕분에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도 쉼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실패라는 생각이 드는 입시에 익숙해진 고등학생의 삶을 비로소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백수가 됐을 때, 그런 태도가 멘탈을 유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이가 많아서인지, 전공이 문제였는지 1년 내내 면접은커녕 서류 통과도 되지 않았고, 기껏 다가온 기회에는 준비되지 못한 말들을 내뱉다 보니 어느새 탈락의 테이프를 끊고 있었다. 그래도 긴 호흡을 갖고 오히려 모든 시간이 쉬는 시간인 지금을 즐기려고 애썼다. 미드 로스트를 한 달 반 동안 꾸역꾸역 다 보았고(시즌 4부터는 살짝 로스트 보는 게 직업이 된 게 아닐까 의심이 들만큼 의무감으로 보긴 했지만...), 오랜만에 과외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쳐보기도 하고, 면접 스터디 모임이 주로 신촌에서 있었던 탓에, 자주 가보지 못했던 신촌, 홍대, 합정 등지를 자주 돌아다니며 작고 예쁜 카페에서 토익 문제를 풀며, 한가로운 오후의 햇볕을 관찰하며 쉴 수 있었다. 무엇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조급함보다는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오래 쉬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치 않은 다중노출


그러다 덜컥 늦은 나이에 취업을 하고 생전 해보지 못했던 프로그래밍을 배워 벌써 8년째 일을 하고 있다. 이전 회사에 있을 때는 잘 쉬지 못했던 것 같다. 사진도 거의 찍지 못하고, 좋아하던 노래도 들을 시간도 없이 늘 프로젝트와 이슈 마감 시간에 시달렸다. 간혹 동료들과의 워크숍이나, 회식자리들은 그다지 쉬는 시간이 되지 못했다. 외향적인 줄만 알았던 성격이 사실은 내성적인 사람이구나 하는 걸 깨닫고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려고 애썼다. 하지만 너무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던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소주 1병, 2병, 3병 주량은 점점 늘어나고, 술에 기대 업된 기분으로 사람들과 떠들다 보니 그게 쉬고 있다고 착각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몸이 너무 망가졌고, 30kg 가까이 체중도 불어나 있었다. 쉼이 아니라 '멈춤'이 필요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쉬는 방법 중 하나다


회사를 잠시 휴직하고 1년을 쉬면서 점심 투어를 다니며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가고 싶었던 곳을 거닐며 다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서서히 번아웃됐던 정신이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일하는 짬짬이 쉬는 법을 느리게 느리게 배워나갔다. 그리고 다시 복직하고 1년을 더 다니다가 지금의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됐다. 


지금 회사에서는 일을 하면서 쉼을 느낀다. 1년도 아직 안된 시간이지만 사람들과 일하는 재미를 오랜만에 느끼고 있는 중이다. 점심시간에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나누는 농담들이 소소한 활력소가 되고, 업무를 어떻게 처리할지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도 오히려 쉼이 된다. 사업의 성장이 가팔라 언제나 일의 난이도는 퀀텀 점프를 하지만, 내게는 없는 우산을 다른 사람들은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고, 함께 우산을 쓰고 걷는 느낌으로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정시에 퇴근하여 집에서, 카페에서 별다른 일은 하지 않지만 푹 쉬고 있다.


되돌아보면 제대로 쉬었을 때 제대로 일도, 미래도 꿈꿀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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