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포르투갈은 왜 가는데요?

포르투갈

by 서해



9월다. 가까운 사람들과 성묘를 마쳤다. 근처 칼국수집. 다들 가을에 뭘 할 건지가 식후 디저트로 올랐다.


반도체 회사 법무팀에 다니는 S. 호주로 늦은 휴가를 간다고 했다. "골코(Gold Coast)에서 서핑하고요. 시드니에서 워홀(Working Holiday) 친구를 만날 거예요." 밴쿠버에 아이 셋을 보내 놓은 W. 또 스위스 여행 중 135m 높이 케이블카에서 번지점프를 했다는 J. 여름 동안 해치웠던 무용담이 꼬리를 물었다.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양푼 칼국수만큼 그득했다.



인천공항 2청사 파리행 비행기는 맨 끝에서 뜬다. 구석진 곳엔 늘 그곳에 어울리는 누군가가 있다


나는 앉은뱅이 밥상 끝에서 뜨거운 국물을 허겁지겁 마시고 있었다. '열무김치가 잘 익었네.'라고 생각하는데 책 좀 읽은 S가 빤히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불쑥 질문을 던졌다. 하루끼 말투로. "근데 라오스엔 아니 포르투갈에는 뭐가 있는데요?"


쇼핑을 하려면 파리를 가고 가구를 보려면 밀라노에 가야지. 런던도 베를린도 이해하겠는데 포르투갈은 왜 가느냐고. "그러게." 나는 대답을 하다말고 입에 남은 국수 가닥을 마저 삼켰다. 생각해 보니 언제 내게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싶다. TV에서 여행상품을 팔면 "저길 가야 해" 했다. 버스킹 프로그램을 보면 "다음엔 저기야" 했고. 그러다 보니 나는 지금까지 남들이 가는 곳만 쫓아다녔다. 어디 가서 말이라도 보태려면 그게 나았다.

그런데 이번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여행. 볼 게 많지 않은 도시. 햇볕과 고양이만 있는 골목길. 영어를 쓰지 않으면 더 좋고. 드로잉 스케치할 트램이 다니면 고맙지. 아아 내게 포르투갈이 딱 그랬다.



왼쪽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에서 보는 리스본 풍경. 오른쪽은 '엄브렐라 프로젝트'로 핫플이 된 아게이다(Agueda)


인천에서 파리까지 11시간. 파리에서 리스본까지 다시 2시간. 리스본 공항에 도착해서도 나는 심드렁했다. 그냥 이렇게 오는 거지 뭐. 제법 여행에 이골이 난 듯해서 스스로 대견했다. 리스본에서 일주일이라니. 아마 나는 새로운 영감을 얻을 거야. 완벽한 게으름과 빈틈없는 무계획을 즐겨야지.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주변에 포르투갈을 여행한 친구는 드물었다. 다녀왔다는 사람도 스페인 여행 끄트머리에 리스본이나 포르투를 잠깐 찍는 식이었다. 그마저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들은 스페인에 함몰되어 포루투갈은 이름 조차 떠오르지 않는 성당이나 달짝지근한 포트와인 얘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리스본 28번 트램과 맨 앞자리 운전석. 트램의 진짜 이름은 엘레뜨리코(Eletricos). 번역하면 전기차 쯤 될까


아내와 나는 포르투갈에만 보름이 넘도록 머물렀다. 그동안 받은 소외를 내가 벌충해주기라도 하듯 스페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리스본과 포르투에서만 일주일씩 지냈다. 그리고 두 도시 사이를 나흘 걸려 지그재그로 올라갔다. 맘먹고 달리면 리스본에서 포르투는 3시간 거리. 그 거리를 우리는 고무줄처럼 쭈욱 늘렸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포르투갈은 여행하기에 참 좋은 나라'이다. 이유는 이렇다. 두서없이 다섯 가지.


가성비와 가심비 둘 다 좋다. 여행에서 나는 가성비를 따지지 않는다. 모름지기 여행이란 '일상으로부터 탈출'이라 믿기 때문이다. 가격을 묻고 성능을 비교하면 그게 일상이지 여행인가 했다. 웬만한 가격은 받아들일 마음인데도 포르투갈 물가는 공격할 의사가 없다. 생활 물가. 체감 물가. 여행자 물가. 이런 용어가 있는 줄 모르겠지만 다들 착하다.



시월 포르투 도루강변의 레스토랑. 낮에는 반 팔, 저녁에는 겉 옷을 걸쳐야 한다.


이 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2만3천불 근처. 물가를 반영한 구매력평가 기준(PPP)으로 보면 3만불까지 훌쩍 오른다. 그만큼 물가가 싸다는 얘기다. 나라별 물가를 나란히 비교한 한국은행 자료를 봐도 우리나라가 100일 때 포르투갈은 86에 그친다. 스페인은 95.

아내와 '트립 어드바이저'가 추천한 레스토랑에서 두툼한 스테이크와 물 좋은 퓌시, 믹스드 샐러드, 감자요리 사이드, 레몬 스프라이트 두 잔을 시켰는데 42유로. 우버 택시로 포르투 시내에서 공항까지 가는데 12유로. 르노 캡처 SUV 연료 게이지 마지막 한 칸 남았을 때 가득 채우면 55유로다. 가성비보다 더 좋은 건 '가심비'이다. 풀어쓰면 '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



길거리 그래피티가 예쁜 리스본 알파마거리 층계참. 고양이는 가장 그림이 되는 위치를 찾아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


단어만 외쳐도 영어가 통한다. 이건 중요하다. 특히 스페인을 겪어봤으면. 스페인에선 '워터'(Water)란 말 조차 '아쿠아'(Aqua)라고 해야 한다. 윗 나라 프랑스는 영어로 물으면 불어로 대답한다. 그런데 웬 일. 포르투갈 사람들은 영어가 능숙하다.

젊은이들은 영어, 스페인어, 불어, 이탈리아어, 심지어 루마니아어까지 할 줄 안다. 아무리 뿌리가 같은 틴 상속어라고 쳐도 대단하다. 말이 통하면 자유여행, 렌터카 여행이 훨씬 쉬워진다. 관광지에도 영어 설명이 나란히 붙어있다. 수도원 가는 길을 물을 때 여행자는 Monastery! 만 외치면 된다. 레스토랑도 마찬가지. 메뉴가 어려우면 Recommend Me 해 보자. 손가락으로 정확히 짚어준다. 아. 끝에 '플리즈' 정도는 붙여야겠다.



'가심비'가 최고였던 신트라 마을 레스토랑. 흐뭇한 식사를 하려면 관광지에서 10분만 벗어나 현지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가야 한다


우리처럼 밥과 생선, 고기를 먹는다.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벼를 가장 많이 재배한다. 쌀을 먹는 나라다. 나라 한쪽은 또 대서양과 붙어있다. 그러니 해산물이 풍부하다. 내륙은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천지다. 해산물과 쌀을 함께 끓인 해물 밥. 닭고기 요리. 삶은 작은 감자. 대구 바칼라우가 좋다. 쇠고기 스테이크는 미국에서처럼 따로 말하지 않아도 미디엄과 미디엄 웰 중간으로 구워온다. 애초에 물어보지도 않는다.

올리브유는 시칠리아보다 많이 두른다. 식전 빵 찍어 먹는 올리브유에 마늘 한 알을 살짝 뭉개 내어온다. 그리고 '즐기세요'(Enjoy)라고 말하는 웨이터. 식사 중에 그녀가 '괜찮아요?'(Everything is OK?)라고 물으면 이렇게 말해주자. '완벽해요. 당신의 미소까지'(Perfect including your smile.)라고.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을 테고. 당신은 오늘 최고로 젠틀한 손님이 된다.



왼쪽 부터 해물밥 아조르데 마리스코, 새끼돼지를 통째로 굽는 코치니요 아사도, 아래는 포르투갈식 프렌치 토스트인 프란세지나


동양인 비하 눈길은 없다. 거리엔 동양인도 많고, 흑인도 많고, 당연히 백인도 많다. 대항해시대에 아프리카로 인도로 또 남미로 진출하면서 식민지 사람들이 많이 들어다. 19세기 이후 포르투갈은 식민지 경영에 실패하면서 살림살이가 빡빡해졌다. 그 와중에 군부 쿠데타와 혁명, 살라자르 독재정권에 시달렸다. 이런 부침을 겪으며 정복이니 지배니 하는 인식이 허물어진 모양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호기심으로 "치나" "자판" 정도는 물어보지만 차별의 느낌은 없다. "코리아" 하면 바로 묻는 게 "노쓰, 수르"다. "수르"하면 '엄지 척'부터 한다. 뭣 땜에 엄지 척인지는 모르겠다. 스페인 같은 강대국을 옆에 둔 처지. 영혼을 노래하는 파두.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 비슷한 게 많아서 일까. 가장 서쪽에 있는 나라, 포르투갈이 가장 동쪽에 있는 나라, 코리아에 차별보다 관심을 보인다. 그것도 따뜻한.



왼쪽 헤갈레이아궁전 거리공연. 오른쪽 알파마거리의 흔한 저녁 풍경. 기타 반주에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부르는 파두로 골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심장은 뜯겨 나갔다. 무참하게


나라는 작지만 이것저것 참 많다. 포르투갈은 남북한 합친 우리나라의 0.4배 크기다. 남한보다 약간 작다. 인구는 1천만 명 살짝 넘어 서울 인구 정도. 그런데 참 다양하다. 바다, 도시, 산이 모두 두 시간 이내다. 대서양 파도가 거친 나자레. 바위산 속에 숨은 몬산토. 문명과 첨단이 풍성한 도시가 서로 지척이다. 가톨릭과 이슬람이 역사 속에서 공존한다. 서로 다른 두 문명이 충돌하니 이야기가 넘친다. 와인과 과일, 음식은 천차만별이다.

기후는 또 어떻고. 남쪽은 아열대. 북쪽은 서늘하다. 계절은 우리보다 두 달쯤 빠르고 또 두 달쯤 늦다. 5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가 여름이라 여행하기 좋다. 리스본 1월 평균온도가 12도. 8월은 24도. 리스본의 위도가 38.7도로 서울보다 높은 데도 지중해성 기후다. 시골로 들어가면 동양인이 보기 드문지 호기심 어린 대접도 받는다. 리스본에서 포르투로 올라가도 좋고 반대 방향으로 내려와도 좋다. 고속도로는 막히는 일이 없다.



도우루강 포르투지역 반대편 '빌라 노바 드 가이아'지구에 있는 와이너리. 지붕이 독특한 칼렘과 내가 방문한 타일러's


쇼핑을 하려면 파리에 가고, 가구를 보려면 밀라노에 가라고 했지만 나름 포르투갈에 대해 아는 게 생겼다. 리스본 트램 운전수가 골목길 모퉁이마다 뛰어내려 주차된 차를 긁지 않으려고 애쓰는 태도. 가게에 들어가 길을 물으면 카운터를 닫고 밖에까지 내 손을 잡고 나와 알려주는 젊은 청년의 친절을 겪었다. 쇼핑카트를 주차장까지 끌고 간 나를 뒤쫓아와서도 '오브리가도'를 외치는 마트 직원에겐 어찌나 미안하던지. 버스 정류장이 아니면 절대로 문을 열지 않는 기사 아저씨의 우직함.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우르르 셀카봉을 휘둘러도 괜찮다며 비켜주는 성당 지기의 여유도 아름다웠다.



왼쪽은 포르투 강변 풍경. 오른쪽은 아줄레주가 아름다운 포르투 상벤투역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밤 몬산토 마을에서 "당신의 포르투갈은 여태 어땠나요?" 라고 걱정스러워 하던 숙소지기 안토니오와 안주인 스텔라의 따뜻한 속마음을 알아버렸다. 포르투갈이 다 이렇다. 하여 이번엔 내가 물을 차례다.

이런 포르투갈엔 왜 가지 말아야 할까?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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