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덴뿌라 그리고 '장미라사'

포르투갈

by 서해



러시아가 일본에 이겼다면 우리는 빵 대신 홀렙(chleb)을 먹을 것이다. 그리스가 그랬다면 아르토스(artos). 독일이라면 브로트(brot). 무슨 얘기냐면 포르투갈이 일본을 개항시킬 때 '빵'이 전해졌다는 다. 빵은 포르투갈어 '빠웅'(pão)에서 나왔다. 일본인들은 이걸 '빵'(パン)으로 발음했고,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였다.


의외로 우리 말에 포르투갈 흔적이 많다. 고향 사투리로 알고 있던 말. 일본 말로 여겼던 단어가 알고 보니 포르투갈 말이었다. 우리말처럼 쓰는 '뎀뿌라'가 좋은 예다. 애써 번역한 '튀김'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뎀뿌라는 포르투갈 신부들이 일본인들에게 해준 말, '콰트오르 템페라'(Quatuor Trempora)에서 왔다고 한다. 음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계절'(four seasons)이란 뜻이다.



리스본의 빵가게를 유심히 봤다. 우리나라 빵은 간식이라 달고, 앙꼬가 있다. 유럽에선 빵이 주식이라 대부분 무덤덤하다


1570년 일본은 나가사키를 개방했다. 예수회 소속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그들은 새우나 생선을 자주 튀겨먹었다. 당시 일본에는 기름에 튀긴 음식이 드물어 선교사들이 먹는 걸 궁금해 했다. 선교사들은 '콰트오르 템페라'라고 부르는 가톨릭 의식을 설명해 줬다. 우리말로 ‘사계의 재'(齋)라고 부른다.


중세 가톨릭에선 계절이 바뀔 때 사흘을 정해 고기와 음식을 먹지 않고 기도하는 의식이 있었다. 겨울 크리스마스, 봄 사순절, 여름의 5월 성령강림 대축일, 가을 9월14일이 가까워지면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을 골랐다. 이날은 금식하며 기도했다. 가난한 이웃에 음식을 나누고, 죽은 이를 추모했다. 이때 생선이나 채소는 찬 음식이라 하여 먹는 것이 겨우 허락됐다. 일본인들은 ‘콰트오르 템포라’에서 ‘템포라’라는 말만 기억하여 ‘뎀뿌라’라고 불렀다.



평화유지, 동산유지가 비누를 만들었다. 고급 세숫비누 '당신의 비누 다이알'은 울산 부잣집으로 시집간 고모만 썼다. 수굼포는 수건을 목에 두른 농부가 그려진 수건표가 있었다


어렸을 때 시골 할머니는 비누를 '석깜' 이라고 불렀다. 어떨 때는 '사분'이라고도 했다. 특히 말간 세숫비누를 '세수 사분'이라 부르며 툇마루 위에 따로 모셔두었다. 대신 '평화'라고 쓰인 사각형 빨랫비누는 뒤뜰 우물가에서 나뒹굴었다. 참봉이셨던 할아버지에게 물으니 비누를 한자로 석감(石鹼)이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분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들이 쓰는 사투리거니 여겼다. 봄장마가 지면 동네 아재들은 무너진 논둑을 손보려고 '수굼포'를 찾았다. 할아버지도 삽을 수굼포라고 불렀다. 나는 사분이니 수굼포니 하는 단어가 신기해서 뜬금없이 그림일기에 그려 넣곤 하였다.



리스본 구시가지 아우구스타거리 뒷길 브라운즈호텔에서 일주일을 묵었다. 스몰 럭셔리 부띠크호텔이라서 로비가 무슨 미장원 같았다


사분은 포루투갈어 사분(sabao)에서 왔다. 리스본의 호텔 욕조에 놓인 세숫비누 포장지엔 사분넷(sabonete)이라고 적혀 있었다. 작다는 접미어 -net이 붙은 거다. 이 말도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사투리 사전을 찾아보니 경상북도에만 남아있다. 수굼포는 네들란드 말 스콥(schop)이 일본에서 스코프로 불리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또 있다. 컵을 뜻하는 곱뿌(copo), 카스텔라, 담배(tabaco), 플라스크(frasco) 같은 말이 포르투갈에서 왔다.


진짜 재밌는 건 '라사'다. 읍내 양복점 이름에 많이 쓰던 '□□라사'의 라사(raxa) 말이다. 포르투갈에선 오버코트 같은 양복감으로 쓰는 양털로 짠 두툼한 방모직물을 이르는 말이다. 그 라사(羅紗)가 우리나라 종로나 소공동으로 들어와 수제 양복점으로 변신했다. 사거리 '장미라사'집 둘째 민석이는 내 친구다. 녀석은 소풍 때마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곱뿌 없으면 몬 마십니다'를 불러 제꼈는데. 혹시 그애는 포르투갈 전문가였을까.


아직도 'OO라사' 이름은 시장통에 가면 볼 수 있다. 내 첫 양복도 아버지가 주례 서주고, 답례로 받은 제일모직 기지로 동네 □□라사에서 만들었다.


말뿐만 아니다. 사람도 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서양사람은 포르투갈 상인이었다. 1604년(선조 37년) ‘지완면제수'로 불린 34세 포르투갈 상인 '조앙 멘데스'는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통영에 들어왔다. 그는 중국인 16명, 일본인 32명, 흑인 1명과 함께 생포되어 북경으로 보내졌다. 조선 국경수비일지인 '등록유초'에 쓰인 내용이다. 그는 1627년(인조 5년) 경주해안에 도착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르(박연)나 1653년(효종 4년)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에 훨씬 앞섰다.


일본에 조총을 전한 것도 포르투갈이었다. 1543년 명나라 상선에 탄 포르투갈인 프란시스코 지모르는 일본 가고시마 남쪽 다네가시마라는 섬의 도주(島主)에게 조총 두 자루를 넘겼다. 그가 준 서양식 소총이 왜군 손에 들려 1592년 조선 땅에 나타났다. 임진년이었다. 명나라 장수 팽신고가 조선을 도우러 온 원군에는 '파랑국' 출신 흑인 병사 4명이 있었다. 조선 장군이 어디서 왔냐고 묻자 포르투갈 주인을 따라왔다고 했다. 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다.



조총은 새도 맞힌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남중국해에 출몰하던 왜구들이 먼저 받아들였고, 포르투갈인이 일본에 전했다


반대편 왜군에도 있었다. 가톨릭을 탄압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천주교 신자 1만 8천 명을 군대로 편성하여 출정시켰다. 예수회 소속 포르투갈 신부 세스페데스는 1592년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부산 땅을 밟았다. 종군신부였다. 그는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인 포로 2천 명에게 세례를 주고, 신도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영어로 Company는 회사 또는 동료란 뜻이다. 이 단어엔 com(함께)과 pan(빵)이라는 포르투갈 말이 들어있다. 동료란 '여럿이 함께 빵을 나눠 먹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에도 있다. 식구(食口). 즉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정서와 포르투갈 생각이 제법 닮았다.


아내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 입에 제일 맞는 건 프랑스 빵인가 봐." 내가 의아해 하자 이렇게 덧붙였다. "뉴욕 제과, 독일 빵집 다 없어지고 파리바게뜨만 남았잖아"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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