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28번 트램의 노스탤지어

포르투갈, 리스본

by 서해



늘 리스본에 오고 싶었다. 프라하에 밀리고, 밀라노에 치였지만 기어코 오늘이 올 줄 알았다. 그렇게 기대했던 이유는 생뚱맞게도 8할이 노면전차, 바로 트램 때문이었다.


리스본 하면 트램이다. 땡땡 소리를 내며 7개 언덕을 오르내리는 트램. 빛바랜 건물 사이를 닿을락 말락 지나는 트램. 사람들은 저만치 트램이 나타나면 어떻게든 사진 배경에 넣으려고 연신 까치발을 해댄다. 이걸 타면 '리스보에타스'(Lisboetas)가 된다. '리스본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리스본 알파마 언덕의 편도 트램 길. 이 길은 트램 말고는 다닐 수 있는 게 없다


매사에 정확한 아내는 도시를 두 종류로 나눴다. '트램이 있는 도시'와 '트램이 없는 도시'. 나는 위키피디아를 뒤졌다. 전 세계 50개 나라에서 약 400개 도시가 트램을 운행했다. 그중 최고가 리스본이란다. 얼른 동의했다. 처음 만들어진 1873년엔 말(horse)이 끌었다. 말똥 때문에 사람들이 타기를 꺼리자 1901년 전기로 바꿨다. 한창때는 27개 노선이었는데 지금은 6개만 남았다. 12번 15번 18번 24번 25번 28번이 그들이다.

아내가 물었다. "샌프란시스코 전차만 할까?" 나도 궁금했다. 와서 보니 외모는 리스본 트램과 샌프란시스코 전차가 가장 닮았다. 그러나 쓰는 기술은 전혀 달랐다. 샌프란시스코 전차는 전기로 달리지 않는다. 케이블로 움직인다. 쉽게 말하면 그냥 줄로 당긴다.



샌프란시스코 전차. 지붕 위로 전력을 공급하는 전기선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땅바닥에 깔린 철로가 세 줄이다. 중간 줄에 케이블을 묻었다.


1869년 겨울. 말 다섯 마리가 끄는 마차가 샌프란시스코 시내 언덕에서 미끄러졌다. 승객 여럿이 숨졌다. 사람들은 말 대신 케이블로 마차를 끌 생각을 했다. 도로에 레일을 깔고, 레일 사이에 홈을 판 후 긴 케이블 가닥을 심었다. 그 케이블을 언덕 위에 설치한 원동기가 끌어당겼다. 전차는 움직이는 케이블을 물었다 놓았다 하며 달리고 또 멈췄다. 이 걸 보면 샌프란시스코 전차는 진짜 케이블카(Cable Car) 다. 공중을 오가는 케이블카와 헷갈릴까 봐 스트리트카(Street Car)라고도 부른다.


누가 봐도 샌프란시스코 전차는 관광용이다. 떠들썩 여행자와 기분 좋은 웃음을 실어 나른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금문교. 알카트래즈 섬. 피어 39를 둘러봤다면 토니 베넷(Tony Bennett) 처럼 목청 높여 '샌프란시스코에 내 맘을 두고 왔다.'(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고 노래해야 한다. 그래야 샌프란시스코를 좀 아는 티가 난다. 그리움이 하도 질겨 별명도 '쇠밧줄 도시'(City of Cable)가 됐다.



리스본의 전차와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는 모습이 가장 닮았다. 그 이유는 한 량으로 된 단칸전차라서 그렇다


리스본 트램은 아직 사람을 실어나르는 수송기능이 남아있다. 한 량으로 된 단칸 전차는 좁은 도로를 자동차와 함께 달린다. 차가 밀리면 뒤따르던 트램이 서고, 트램 안 시간도 함께 멎는다. 공간이란 시간이 만드는 산물. 한 칸에 탄 사람들은 속절없이 한통속이 된다. 한 번쯤 본 듯한 변두리 주민들. 그들의 지친 발끝에서 먼지처럼 날리는 애환. 소설가 김연수는 리스본 트램엔 언제나 '노스탤지어'가 가득하다고다.


화요일 아침. 아내와 나는 트램을 타러 나갔다. 여기 사람들은 '엘레뜨리꼬'(eletrticos)라고 부르지만 그냥 '트램'하면 다 통한다. 28번 트램이 출발하는 마르팅 모니즈(Martim Moniz)에서 40분 걸리는 반대편 종점까지 타보기로 했다. 사실 리스본 시가지를 익히려면 제일 손쉬운 게 트램을 타는 거다. 그중에서 28번 노선은 역사지구를 관통하는 가장 로맨틱한 노선이다.


출발한 지 십여 분. 트램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알파마 지역으로 들어섰다. 소형차 한 대가 겨우 지날만한 좁은 주택가 언덕길. 엉덩이를 삐죽 내밀고 버릇없이 주차한 오토바이를 주먹 하나 차이로 간신히 비켜났다. 커브 길에서는 맞은편에서 오는 12번 트램과 부딪힐 듯 마주쳤다. 우리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저쪽 사람들과 슬며시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얼굴마다 웃음이 번졌다.



트램 두 대가 만나면 알파마 길이 꽉찬다. 뒤따르는 자동차는 군말없이 기다린다


속도가 느려지자 이번엔 뒤따라 오는 트램이 꼬리를 물었다. 아이들 장난처럼 기차놀이가 시작됐다. 사람들은 대놓고 낄낄거렸다. 운전수는 맨 앞 스툴 의자에 앉아 왼손으로 기어를 철컥철컥 돌렸다. 우리들의 행복도 철컥철컥 올라갔다


정류장도 아닌데 갑자기 트램이 멈춰 섰다. 운전수가 훌쩍 뛰어내렸다. 아무도 내리지 않았고, 또 아무도 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의아한 우리는 밖을 내다보았다. 이번엔 배달 트럭이 삐딱하게 서서 길을 막았다. 운전수는 비껴갈 만한지 차체 기울기를 이리저리 확인했다.



트램 운전수는 운임을 받고 영수증을 끊어주거나 크랭크 축 같이 생긴 기어를 돌려 속도조절을 한다. 전광 안내판. 정류장 위치도 이런 건 없다


갸우뚱 고개짓을 하던 운전수는 우리더러 기다리라고 소리친다. 그리곤 배달 트럭 운전사가 나타날 때까지 노점상 할머니와 수다를 떨었다. 아무도 타박하지 않았다. 28번 트램에선 종종 일어나는 사건인 듯. 나는 차창 밖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만인가 이런 여유. 파란 하늘엔 전선마저 느슨하게 늘어져 내렸다.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 아내와 나는 리스본 대성당(Lisbon Cathedral)에서 트램을 내렸다. 여긴 6세기 무어인이 모스크로 쓰던 걸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한 곳. 트램이 대성당 앞을 지나는 모습은 리스본의 대표 이미지다. 나는 몇 번이고 버튼을 눌러 그림 같은 사진을 얻었다.



리스본 트램은 길이 막히면 멈추고, 뚫리면 다시 달린다. 부다페스트, 밀라노, 프라하처럼 전용철로가 없다. 그래서 가장 로맨틱하다


성당 옆길을 10분 정도 걸어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상 조르제 성(Castelo de S.Jorge)에 도착했다. 기원전 7세기 로마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고, 11세기 무어인들이 성을 다. 리스본을 한눈에 보려면 만 한 곳이 드물다.


성에서 놓치지 말 것은 와인 트럭이다. 이름은 '와인과 전망'(Wine & View). 와인 한 잔을 들고 성벽에 기대섰다. 느닷없이 성에서 기르는 공작새 무리가 나타났다. 군사들처럼 보란 듯 일렬 행진을 한다. 졸졸 뒤따라가면 성벽 걷기를 하는 곳에 이른다. 한 바퀴는 데 . 따로 돈을 내진 않는다.


나중에 포르타스 두솔 전망대(Largo das Portas do Sol)로 내려올 땐 그라피티 범벅인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인스타에 떠도는 인생 사진은 모두 이곳에서 찍은 거다.



상 조르제 성은 1137년 포르투갈 캐서린 공주가 영국 찰스 왕세자가 결혼하자 포르투갈 사람들이 영국의 수호성인 성 조지에게 헌정했다


28번 트램을 타고 돌아본 알파마 언덕과 구시가지. 아침에 나갔는데 훌쩍 오후 세 시가 넘었다. 저녁 출정을 위해 호텔로 돌아와선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저녁에는 파두를 보고, 내일은 15번 트램을 타고 벨렝(Belem)로 갈 생각이다.


문득 내 삶에 면목 없을 때가 있다. 우리는 조금 지쳐 있던 것. 세상으로부터 쫓기듯 종종걸음을 쳤었다. 계획 없이 훌쩍 떠나 온 리스본. 시간은 다시 윤기를 얻어 반짝거렸다. 다 트램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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