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까뮈>가 꼬르드에서 한 말이다. 까뮈는 1950년대 중반 꼬르드의 풍경에 반해 이곳을 자주 찾았다.
마을의 정식 이름은 꼬르드 쉬르 씨엘(Cordes sur Ciel). 우리 말로 '하늘 위의 밧줄'이란 뜻이다. 여기 사람들은 r 발음에 콧소리를 섞어 '꼬흐드'라고만 부른다. 남프랑스 옥시따니(Occitanie) 지방을 흐르는 쎄루(Cerou) 강이 알비(Albi) 못 미쳐 바위산을 휘감아 만든 백여 미터 높이 협곡. 꼬르드는 바위 산 꼭대기 짙은 안개 속에 숨어 아무에게나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꼬르드 전경을 보려면 건너편 산으로 올라야 한다. 르노캡쳐가 그나마 차고가 높은 SUV라서 울퉁불퉁 산 길을 버텼다.
나는 툴루즈 공항을 나오자마자 A68 도로에 차를 올렸다.
"Keep Left at the Fork!"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구글맵을 터치하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미끄러져 나왔다. 서울에선 쓸 일이 없어 몇 달씩 들여다보지 않다가 낯선 공항에서 렌터카를 출발시키며 불러내는 구글맵. 아내와 내겐 이제 미더운 동료다. 생기가 돌았다. 안개에 묻힌 꼬르드 사진 한 장과 동요 같은 이름. 지난 겨울 나는 들썩거렸다. 안데르센처럼 '눈이 녹고 황새가 날아들고 첫 증기선이 출발하면 떠나야 한다는 충동으로 고열에시달렸다'고나할까.다시프랑스를 여행할 계획을 세우며 제일 먼저 꼬르드에 진한 밑줄을 그었다.
서울에서 파리까지 11시간.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툴루즈까지 1시간 20분. 다시 툴루즈에서 꼬르드까지 이번엔 자동차로 1시간.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해서 따뜻한 저녁이라도 먹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프랑스는 가게 문을 일찍 닫는데 더구나 꼬르드는 이름난 여행지가 아니어서 늦게까지 문을 여는 곳이 드물게 뻔했다. 진눈깨비가 후드득후드득 창을 때렸다. 프랑스 남쪽 피레네의 4월. 봄은 동의하지 않아도 온다지만 여기는 아직 멀었다.
툴루즈공항은 손바닥만하다. 바깥 날씨는 2-3도를 오르내려 트렁크에서 긴 옷을 꺼내 입었다. 이번 복장은 망쳤다. 여행 내내 단단히 껴입을 수 밖에.
꼬르드는 1222년 처음 세상에 나타났다. 13세기 초 프랑스 남부에는 로마 가톨릭에 저항하는 신교, 카타르(Cathars)파가 번성하였다. 이들은 1140년 프랑스 아래쪽에 처음 나타난 후 금세 라인강 지역과 북이탈리아까지 퍼졌다. 교황은 이들을 해산시키려 1181-1229년에 세 차례나 십자군을 내려보냈다. 툴루즈 백작 헤이몽(Rue Raimond) 7세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토벌군에 맞서 쎄루계곡 바위언덕에 요새를 건설하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견고한 바위 성채 도시, 꼬르드가 태어났다.
처음엔 마을 주변을 흐르는 쎄루강을 따라 가죽세공업자들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가죽으로 이름난 스페인 코르도바 (Cordoba)를 빗대 꼬르도아(Cordoa) 라고 불렀다. 성채 덕에 꼬르드는전쟁을 비켜갔다. 여기에 거주민의 마음을 얻으려 세금 거두기를 줄이자큰 장이 서고 교역이 활발해졌다. 장인들은 너도나도 부유해졌다.
꼬르드 관광청 홈페이지에서 옛 그림을 가져왔다. 바위 산을 발이 여럿 달린 동물이 떠받치도록 그렸다. 성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건물을 두고 길이 나뉘는게 전형적인 성채마을 모습이다.
한창때인 1280-1350년에는 신흥 부자로 떠오른 상인 부르주아들이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고딕 양식의 웅장한 저택을 잇달아 지었다. 화려한 건물은 지금도 좋은 눈요깃거리다. 13세기 말까지 꼬르드는 다섯 번이나 성벽을 산 아래로 확장하였다. 상주인구는 6천 명까지 늘었다. 1598년 36년간 계속되던 프랑스 가톨릭 신구교 사이 전쟁이 끝날 무렵 꼬르드는 프랑스 남부를 장악한 위그노(Huguenots 신교 가톨릭)의 중심지가 되었다.
흑사병이 돌자몰락이 시작되었다. 인구가 2천 5백명까지 떨어졌다. 근처에 미디 운하(Canal Midi)가 물길을 텄다. 이번엔 꼬르드의 상업과 교역이 눈에 띄게 줄었다. 1870년 눈 밝은 지역사업가 알베르 고스(Albert Gorsse)가 스위스에서 기계 자수기술을 들여오자 잠깐 돈이 돌았다. 그게 다였다.
젖은 돌길, 우주의 속도로 나무 문을 기어오르는 달팽이, 오래된 책방. 꼬르드에서 만나는 정겨운 일상이다.
그후엔 예술가가 찾아왔다. 2차 대전 중 화가 이브 브레이예(Yves Brayer)를 따라 유화 화가, 조각가들이 모였다. 주변이 온통 대청(大靑) 밭이라 파스텔 블루라 부르는 물감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1950년대에는 <이방인>을 쓴 알베르 까뮈(Albert Camut), 소설가 엑토르 말로(Hector Malot), 극작가 필리프 에리아(Philippe Heriat)가 작업실을 내었다. 시인 지안느 하멜 칼(Jeanne Ramel Cals)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꼬르드를 '하늘 위의 밧줄'(Cordes sur Ciel)이라 쓰면서 모두 따라 불렀다.
제 이름처럼 꼬르드는 가을부터 봄까지 자욱한 안개 늪 위로 홀연히 솟아올랐다. 이 모습 때문에 '별에 더 가까운 마을'이란 별명도 얻었다. 2014년 국영 텔레비전방송 《France 2》는 꼬르드를 '프랑스인이 좋아하는 마을' 1위로 뽑았다. 그 덕에 사람들이 하나 둘 찾기 시작했지만 지금 인구는 고양이를 포함해서천여 명에 불과하다.
그들이 걷던 길을 내가 걷는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사흘 내내 특별한 계획없이 이리저리 돌길을 걸었다.
저녁 무렵 도착한 꼬르드는 인적이 없었다. 호텔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낡은 숙소 주인 끌로드(Calude)와는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았다. 나는 손짓발짓으로도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무작정 나와 마을 공터 옆 간이식당을 발견하고가까스레 저녁 끼니를 해결하였다.
'별에 더 가까운 마을'에 어둠이 내렸다. 골목엔 화가 조각가 도예가 가죽세공 예술가들이 공방을 열어 두런두런 그나마 인기척을 내었다. 이슬비에 앞머리가 젖어 자꾸 이마에 붙었다. 우산을 쓸지말지 아까부터망설였다.근대화라는 굴착기가 외면한성벽. 800년 내내 꼬불꼬불한 골목길. 물기에 비친 바닥이 제철 고등어처럼 반짝거렸다. 뒤처진 것들끼리 나누는 동료애. 호흡기를붙잡는 축축한 시간들. 나는 그 속을 관통하여 다락방 숙소로 돌아왔다. 문을 걸어 잠궜다. 차가운 지붕마다 내걸린 십자군의 음성. 창문을 흔드는 가톨릭의 깃발 소리에 밤새도록뒤척이다 새벽을 맞았다.오전은고양이를 따라 동네 커피가게에 앉아 햇볕을 쬐었다. 보통의이틀이그렇게지나갔다.
아치형 성문 옆이 내가 묵은 숙소다. 여긴 중세복장 십여 벌을 갖춰두고 투숙객이 체험할 수 있도록 무료로 대여해 줬다.
꼬르드에선순례자를 만날 수도 있다. 프랑스 중부 르퓌(Lu Puy)에서 출발하여 '콩 포스텔'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아침을 들다 캄보디아 여인, 새리(Sarey)를 만난 것도 그래서였다.
작은 키에 까만 피부, 새리는 은퇴한 남편 존과 프랑스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요란한 스페인 길은 신앙이 깊은 사람들에게 양보하였다. 둘은 프랑스 시골의 외진 길을 걷는데 그날은 종일 쉴 거라며 조용히 웃었다. 외교관 아버지를따라불어와 영어를 익혔고 이집트 카이로에서 대학을 다녔다고 했다. 마침 호텔주인 클로드와 유창한 불어로 안부를 나눠 내가 가진 동남아인에 대한 선입견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날도 또 다음 날도 새리 부부와 우리는 소박한 아침 식사를 함께나눴다. 우리말에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식구'라 부르며 가족과 동의어로 쓴다. 한솥밥을 나누는 게 가족의 전부는 아니라도 한 단면은 틀림없기에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마침 새리는 우리 여정을 거꾸로 돌아 내려오는 터라 우리에게 이런저런 도움말을 아끼지 않았다. 순례길을 걸으면 무엇이든 나눠주고 또알려주고 싶은모양이기도 했다.
마지막날 아침. 식사 끝 무렵에 나는 그녀의 주소를 받았다. 언젠가 호주를 여행하게 되면 자신들이 사는 케언즈도 들러달라는 말과 함께. 서울-꼬르드보다 서울-케언즈가 훨씬 가깝다며반짝흰 이를 드러냈다.한가로운시골 마을에서 아침마다 이야기를 나눠주어 고맙다며 이별의 악수까지 청했다. 몇 마디 어중간한 신변잡기와 멋쩍은 웃음이 뭐 그리 좋았을까 싶었지만 여행이란 원래 사람을 무르게 만들기도하는 법. 나는 가만히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다. 꼬르드는 중세 가톨릭의 역사와 푸른색 파스텔 블루의 기원, 화려한 고딕양식의 건물 말고도 우연히 만나는 순례자와의대화를 기억할만한 곳이었다.
'하늘 위의 밧줄'이란 말만 들으면 구름 위에서 내려 온 동아줄이 마을에 드리워져 있을 것 같다. 누구라도 여길 오면 그 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꾼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새리에게 안부메일을 보낼까 망설이다 결국 쓰지 않았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에 인연을복제하려는건 성급하니까. 그보다 여행이 직조하는 인연을 더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고쳐 생각했다. 어느 여행길에서 새리와 존을 다시 만난다면 그 조우는 또 얼마나 느닷없으며 공교로울까.삶이란 그리고 여행이란 계획과 우연이 아무렇지 않게 뒤섞일 때 더욱 아름다운 무늬를 짓는 거라고믿고 싶었다. 사진 한 장 때문에 꼬르드를 찾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