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은 자극 보다는 휴식의 느낌을 준다. 밀고 들어오는 색이 아니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색이다"
1810년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색채론>에서 파란색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툴루즈(Toulouse) 주변의 작은 도시를 여행하다 남프랑스 들판에서 지천으로 자라는 대청(大靑)을 만났다. 꼬르드 아뜰리에엔 대청에서 추출한 파스텔블루(Pastel Blue)로 그린 그림이 가득했다. 연한 파란빛이 너무 아름다워 무슨 색이냐고 물었더니 화가는 성벽 너머 초록을 가리켰다. 지금 이곳은 파스텔이한창이라면서.그는 작정이라도한듯 파스텔블루에 관한 긴 이야기를 꺼냈다.파란색이 끌어당기고내가따라가는 여행이 엉겹결에 시작되었다.
대청의 정식 이름은 Isatis Tinctoria. 사람들은 길고 어려운 이 말 대신 그냥 파스텔 또는 우드(woad)라 부른다. 여기서 파란색 염료를 뽑아낸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15세기 초 툴루즈는 인근 로라게(Lauragais) 들판에서 자라는 식물 파스텔을 찧어 파란색 염료를 만들었다. 그걸로 마구 돈을 벌어들였다. 파스텔에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염료를 추출하였는데 그만큼 수익이 좋았다. 당시 툴루즈와 알비, 카르카손에 세운 대청 공장을 가리켜 '푸른색의 황금' (blue gold)이라 부를 정도였다니까.
툴루즈는 파란색 염료를 항구 도시 바욘, 보르도에서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으로 실어 보냈다. 파란색은 수요가 많아 툴루즈엔 금방 부티가흘렀다. 1500년대 초반 툴루즈의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 건물인 베르누이 호텔(Hotel Bernuy), 아세자 호텔(Hotel d'Assezat)은 모두 파스텔 염료를 팔아 번 돈으로 지었다.
왼쪽은 호텔 아세자. 오른쪽은 호텔 베르누이. 둘 다 파스텔 블루를 팔아 번 돈으로 지은 툴루즈의 르네상스 건물이다.
그후 인도에서 인디고블루가 들어왔다. 코발트블루, 울트라마린까지 가세하면서 파스텔블루를 찾는 이가 줄었다. 요즘은 패브릭 제품 외에 파스텔 씨앗에서 추출한 오일로 스킨케어 제품을 만들어 조금씩 인기를 되찾고 있다. Isatis Tinctoria란 말은 그리스어로 '치유하다'라는 뜻. 사람들은 파스텔에 치유의 기운이 숨어있음을 눈치챈 거다. 나는 마을을 걷다가 파스텔블루로 칠한 대문과 마주치면 색의 유래를 생각하며 한참씩 바라보곤 했다.
꼬르드에 파스텔블루로 색칠한 건물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19세기 영국인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그리스 시인 호머에게 빠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연구했다. 책을 읽다 그는 호머가 '파란색'이란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하늘도 포도주색이라고 썼을뿐이었다. 알고 보니 호머뿐만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문헌 어디에도 파란색은 등장하지 않았다. 글래드스톤은 '그리스인은 모두 색맹이다'고까지 주장했다. 정말 고대 그리스인들은 파란색을 구분하지 못했을까. 놀랍게도 그렇다. 사실이다. 인간이 어떤 색을 보는 능력은 그 색을 가리키는 단어가 만들어진 뒤에 생긴다고 밝혀졌다.
인간은 직접 만들 수 있는 색에만 이름을 붙였다. 흰색과 검은색이 가장 먼저 이름을 가졌다. 뒤를 이어 빨간색 노란색 녹색. 파란색은 꼴찌였다. 자연에서 찾기 힘든 파란색이란 말은 맨 나중에야 만들어졌다. 파란색 꽃은 인공교배로 나온다. 6만여 척추동물 중에 파란색 피부를 가진 건 단 2 종류. 파란색을 만들지 못했던 고대 그리스인은 주변에서 파란색을 보더라도 별개의 색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 초까지 파란색은 외면당했다.
툴루즈, 카르카손. 꼬르드 주변엔 5-6월경 노란색 꽃을 피우는 파스텔이 지천이다. 가운데는 파스텔 잎을 찧어 파랜색 염료를 만드는 모습이다.
파란색이 사랑받기 시작한 건 교회에서 쓰면서부터다. 11세기 파리 근교 생드니수도원 원장 쉬제르(Suger)는 부속교회를 세우며 처음으로 파란색을 썼다. 당시는 사파이어를 가장 고귀한 보석으로 쳤다. 쉬제르는 파란색이 바로 사파이어의 색이자 교회를 채우는 신성한 색이라고 믿었다.
13세기 들어 파리의 생트샤펠 성당, 사르트르성당 건축에 파란색이 쓰였다. 얼마 후 성모 마리아의 순결,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색으로까지 받아 들여졌다. 파란색을 찾는 손이 늘면서 대청 밭 천지인 툴루즈와 프랑스남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200-300년 동안 프랑스 남부 미디피레네지역에서 생산된 파스텔블루가 온 유럽을 파랗게 칠했다.
왼쪽 사르트르성당과 오른쪽 생트샤펠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파란색이 쓰였다. 특히 생트샤펠 성당은 파란색 스테인드글라스 덕분에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힌다.
파란색의 최고봉은 '울트라마린'이다. 영어로ultramarine. 접두사 ultra 때문에 '아주 짙은 바다색'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여기서 ultra는 extremely가 아니라 beyond란다. 즉 '바다 건너온 색'이란 뜻. 어떻게 물감에 '바다 건너온' 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청금석(靑金石)이란 보석이 있다. 영어로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 보석상들은 라피스라고 부른다. 라틴어 '푸른(lazul) 돌(lapis)'이 그대로 이름이 된 이 보석은 정말이지 끔찍하게 비싸다. 지구에서 나오는 곳이 오직 아프가니스탄 딱 한군데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 부근 해발 7천 미터 한두쿠시산맥 깊숙한 오지 바다크샨에서만 나온다. 청나라 시절 청금석 구슬 한 개면 도시 전체를 몽땅 살 수 있었다고 했다. 중국 황족들이나 즐기던 보석이었다. 지금도 청금석 1kg에 1만 5500유로, 우리 돈으로 2천만 원을 넘는다. 울트라마린은 바로 이 청금석을 으깨어 만든 물감이다.
왼쪽이 청금석 원석. 가운데는 라피스 라줄리로 가공한 보석, 오른쪽은 물감으로 만들기 위해 으깬 울트라마린 안료다.
13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활동하며 르네상스를 연 천재 화가 조토(Giotto di Bondone). 조토는 파도바 부호 스크로베니의 부름을 받고 예배당에 성화를 그렸다. 그는 예수와 성모마리아의 옷 그리고파란하늘을 청금석 물감울트라마린으로 색칠했다. 부자였던 스크로베니는 조토가 그 색을 마음대로 쓰도록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뜨거운 경쟁이 시작되었다. 누가 얼마나 더 청금색 물감을 칠할 수 있느냐를 놓고 유력가문과 왕, 귀족, 교회가 다투어 나섰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그린 조토의 그림 1,2,3과 로마 시스티나성당의 최후의 심판4과 아담의 창조5.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번엔 보르도를 통해 울트라마린이 들어왔다. 툴루즈를 거쳐 파리 근교의 성당이나 부자들에게 주로 공급되었다.화가들은 그림에 울트라마린을 마음껏 써보는 게 소원이었다.
화가 중 울트라마린을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고흐와 베르메르였다. 고흐의 밤하늘엔 검은색이 없다. 고흐가 그린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 <별이 빛나는 밤> <교회> <슬픔에 잠긴 노인>에 칠한 색은 바로'빈센트의 빛'이라 불리는 울트라마린이었다. 비싼 재룟값 때문에 동생 테오에게 늘 신세를 졌던 고흐도 크롬옐로(chrome yellow)라하는 노란색과 울트라마린에서만큼은 양보가 없었다.
왼쪽부터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교회' '슬픔에 잠긴 노인'
안타깝게도 크롬옐로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화하면서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의 노란 꽃잎과 줄기가 점점 갈색으로 시들고 있다는 기사를 얼마 전 읽었다. 울트라마린은 다행히 '맑지만 차가운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우유 따르는 여인>을 그릴 때 울트라마린을 썼다.
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베르메르는 물감 값을 대느라 말년에 빈털털이가 되었다고 한다.
툴루즈를 떠난 열흘 후. 나는 고흐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와즈(Auvers sur Oise)를 찾았다. 마을에서 한참을 걸어 어두워지는 보리밭에 도착했다. 해질 녘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한 개와 늑대의 시간. 소슬한 바람에 지는 해가 설핏했다. 고흐가 좋아했던 색 크롬옐로와 울트라마린이 번갈아 내렸다. 그림에서처럼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우연히 파스텔블루를 만나 울트라마린 이야기를 들었다. 이젠고흐마을까지찾아왔다. 여행속에서 또 다른 여행을 한 셈이랄까. 나는 눈을 감고 큰 숨을 들이마셨다. 보리밭 전체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금방 기관지가 서늘해졌다. 내게 여행은 뒤죽박죽. 늘 이런 식이지만세상공부를 또 한바탕했으니 그리 나쁠 건 없다 싶었다.
오베르 쉬르 와즈 고흐의 무덤 뒷편으로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이 있다. 나는 먹먹한 심정이 되어 오래도록 서 있었다.
젊은 시절 항해사로 세계 곳곳을 여행한 고갱. 그는파리에서 주식거래 중개인으로 전업할 때 학력 란에 '여행'이라고써 넣었다. 가장 좋은 학교는 길 위에 있다며. 또 그만큼 여행에서 많은 걸 배웠다는 고백이었다. 얼마나 멋진 얘긴지. 언젠가 나도 그렇게 써야겠다는생각을했다.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고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받은 감동을 마구마구 전염시켜주고 싶었다. 그 오지랖으로슬쩍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