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이름에 LOVE란 말이 들어간 곳이 있다.바로 슬로베니아(sLOVEnia)다. 시인 김이듬은 슬로베니아를 '미운 사람에게는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은 여행지'라고 했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라냐, 블레드호수, 프레자마성, 그리고 피란을 여행했다. 초록이 싱그러운 계절, 그 한복판을 쉬엄쉬엄 렌터카로 관통했다.
구글맵에서 보면 발칸반도 맨 위쪽 왼편에 있는 나라가 슬로베니아다. 유럽전체로 보면 중부유럽이라 할까 아니면 남부유럽이라 할까. 위로 오스트리아, 양옆으로 이탈리아와 헝가리, 아래로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마주한다.
동부 알프스를 일컫는 율리언알프스(Julian Alps)가 슬로베니아 이마를 처마처럼 덮는다. ‘율리안’ 이란 이름은 이 산맥 밑에 자치도시를 세운 줄리어스 시저로부터 왔다. 왼쪽으로 피란이라는 작은 도시를 통해 아드리아해와 아주 잠깐 만난다. 그 짧은 해안을 두고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종종 낯을 붉힌다. 이렇게 슬로베니아는 볕 잘드는 알프스와 코발트색 아드리아 해를 모두 가졌다.
류블라냐성에서 내려다 보는 신 시가지 먼 풍경
발칸반도의 '발칸'이란 따발총을 가리키는 Vulcan이 아니다. 터키어 Balkan에서 온 말로 '산맥'이란 뜻이다. '반도'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육지. 영어로 보면 더 쉽다. 반도(peninsular)는 라틴어 paene(거의)과 insular(섬)가 합쳐져 만들어진 '거의 섬이 될 뻔한 땅'(almost island)이다. 하긴 우리말 '반도'도 '절반이 섬'이란 뜻이니 쉽긴 마찬가지다.
오래전 슬로베니아는 베네치아공국의 땅이었다. 16세기에 오스만제국의 침략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지배를 받다가 1929년 유고 슬라비아로 독립했다. 2차대전으로 독일에 점령됐다가, 1945년 요시프 티토가 이끄는 유고연방으로 다시 등장했다.
1980년 티토가 죽었다. 유고연방은 지도자를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슬로베니아는 연방의 결속이 느슨해진 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1991년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선포하고,이를 저지하던 세르비아 연방군과 류블라냐에서 '열흘 전쟁'을 치른 끝에 자유를 얻었다.
류블라냐 성에서 열리는 겷혼식 모습
자그레브에서 두 시간 반 정도 차를 달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라냐에 도착했다. 류블라냐는 슬로베니아어로 '사랑스럽다'라는 뜻이다. 소설가 강병윤은 류블라냐를 '아내를 닮은 도시' 라고 썼다. 작고 아름답고 친절하고 깨끗하기 때문이란다. 부킹닷컴으로 예약한 '페라리 아파트'는 페라리만큼 근사한 레지던스 호텔이었다. 약속보다 1시간이나 늦었지만 주근깨 많은 레베카(Rebeka)는 연신 생글거렸다.
7층 방에 짐을 풀었다. 레베카는 TV는 어떻고, 와이파이는 어떻고 하며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애를 썼다. 나와 아내는 잠자코 들었다. "일요일은 전부 무료주차니 자동차를 몰고 류블라냐 성부터 오르는 게 좋아요" 그녀는 마지막 귀띔을 남기고 콩콩 발을 구르며 사라졌다. 발코니 너머 구름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문득 여유가 생겼다. 아, 좀 천천히 움직이자. 나는 의식의 시곗바늘을 '느린 안단테'에서 '아주 느린 아다지오'로 돌려 놓았다.
류블라냐는 용의 도시다. 박쥐의 날개와 불을 뿜는 입, 날카로운 독수리 발톱을 가진 용 말이다. 서양에서는 용을 물리쳐야 할 괴물로 취급하는데 류블라냐는 도시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이 사람들의 유쾌한 '생각반전'에 손뼉을 쳐주고 싶었다. 류블라냐 인근 습지에 살던 용을 잡아 언덕 꼭대기 동굴에 가두고 그 위에 성을 지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수백 년 동안 남의 지배를 받았던 까닭에 꺼림칙한 용의 힘을 빌려서라도 도시를 지키고 싶었나 보다. 구시가지를 에워싼 류블라니챠강에 드래곤브리지를 놓고, 다리 입구 네 곳에 자신들을 지켜줄 용 네 마리를 청동으로 세웠다.
류블라냐 구 시가지
우리 조상들은 용을 성스러운 동물로 여겼다. 고구려 사신도나 신라 문무대왕 기록에 나오는 용은 나라를 지키고, 물을 다스렸다. 외적의 침략이 많고, 물이 소중한 농경사회이니만큼 힘세고 비를 부르는 용은 융숭한 대접을 받는게 당연했다.
서양의 용(dragon)은 우리와 반대다. 사람들을 못살게 굴며 인질을 잡아먹는 악의 화신이다. 전설 속 훌륭한 기사는 꼭 용을 죽이고 공주를 구해내야 얘기가 끝난다. 사람들은 어디든 강력한 무엇에 기대고 싶은 법. 동양에선 용이란 동물을 믿었으며, 서양에선 용을 물리친 용감한 기사에게 의지했다.
류블라냐 성을 내려오면 곧 구시가지다. 도시는 아주 깨끗해서 보도블록을 깨서 먹어도 될 만했다. 모던과 클래식이 적당하게 섞여 번잡하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류블라니챠강은 폭이 청계천만 해 넘나드는데 부담이 없다. 강을 따라 야외카페며 다리, 광장이 번갈아 나타난다.
장소마다 알곡 같은 이야기가 따라온다. 낭만적인 이야기, 슬픈 이야기, 설레는 이야기. 진부한 듯 곡진한 이야기들은 물줄기를 따라 흐르기도 하고, 오래된 다리를 건너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북적대는 광장으로 다시 모여들 때쯤 하나둘 가로등이 켜졌다. 어둑신한 저녁이 왔다.
프레셰렌의 동상 앞에 앉았다. 누군가 그의 시 '축배'를 큰 소리로 읽었다. 프레셰린광장의 흔한 일상이란다.
류블라니챠 강 안쪽에는 중세건물이 오밀조밀 들어앉았다. 강 바깥쪽은 프레셰렌광장을 출발점으로 신시가지가 시작한다. 프레셰렌 광장은 슬로베니아 민족시인 프란체 프레셰렌을 기념하는 곳이다. 광장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프레셰렌의 시 ‘축배'는 슬로베니아가 독립할 때 국가로 불렸다. 사람들은 그가 쓴 시를 좋아하지만 애틋한 러브 스토리를 더 아낀다. 프레셰렌은 부유한 율리아(Julija Primic)를 사랑했지만 신분 차이로 인해 끝내 결혼하지 못했다. 죽으면서까지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라고 고백한 시인. 그녀 이름을 딴 노래를 수십 편 남길 만큼 절절했던 사랑은 아직 진행중이다.
프레셰렌 동상은 저만치 떨어진 율리아 조각상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넘치는 슬로베니아와 류블라냐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동상이 있을까 싶었다.
류블라니챠 강에 어둠이 내리자 '도살자의 다리'(Butchers' Bridge)에 노란불이 켜졌다.
프레셰렌 광장 바로 앞에 있는 다리는 모양이 독특하다. 세 개가 겹쳐 놓인 다리는 이름이 ‘트리플 브리지(Triple Bridge)이다. 다리엔 '빈과 베네치아를 잇는다'라고 씌어 있다. 슬로베니아를 번갈아 지배했던 베네치아와 합스부르크왕가의 멱살이라도 쥐겠다는 걸까. 슬쩍 이 사람들의 다친 마음을 보는듯 해 안타까웠다.
다리는 1280년에 그저 평범한 목조로 처음 놓였다. 구시가지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화재나 홍수로 무너졌다가 고치기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1931년 플레츠니크(Plecnik)에 의해 지금과 같은 세 갈래 다리가 되었다. 플레츠니크는 '바르셀로나에 가우디가 있다면 류블라냐에는 플레츠니크가 있다'라고 떠받치는 슬로베니아의 대 건축가다.
다리 위에서 나와 아내는 몇 번씩 여행했던 두 도시, 빈과 베네치아를 얘기했다. 나는 "이쪽으로 가면 빈"이라고 아는 척을 했다. 아내는 뒤돌아 반대편을 가리키며 "그럼, 이쪽이 베네치아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함께 웃었다. 우습지도 않은데 우스웠다. 몇 년 사이 우리는 세상을 허영허영 돌아드는 걸리버여행자가 돼 버렸다.
다리 한쪽 끝에서 노란 옷을 입은 금발 여인이 난간에 기대선 중년의 사내와 오랫동안 입을 맞췄다. 아마도 그들은 이 다리가 잇는 두 도시, 베네치아와 빈에서 온 것이 분명했다. 얼마만의 만남이길래 저리도 애틋할까. 그들을 위해서라도 이 트리플 브릿지가 있는 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더 방해하고 싶지않았다. 나와 아내는 자리를 옮기면서 그들을 대신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트리플 브릿지, 고마워 플레츠니크"
중년의 연인은 프레셰렌과 율리아의 모습. 또는 빈과 베네치아에서 온 헤어졌던 연인의 재회를 상상하게 했다.
류블라냐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작은 도시라 금방 눈감고도 다닐 정도였다. 빈이나 부다페스트처럼 너무 커서 며칠을 지내도 손안에 들어오지 않는 도시가 있다. 그런 곳은 떠날 때까지 외지인 느낌을 버리지 못했다. 류블라냐는 두세 번쯤 온 곳처럼 이내 편안해졌다. 그게 맘에 들었다.
슬로베니아란 나라. 잘 몰라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오감이 흠뻑 젖도록 위로 받았다. 따뜻한 물로 막 샤워한 그런 느낌. 이래서 아내 같은 도시라 했을까. 글쎄. 아내에게만 살짝 보여주고 싶은 도시였다.
떠나는 아침. 레지던스 주차장을 나섰다. '아쉬울땐 빨리 벗어나는 게 최고지' 나만의 이별 방식대로 슬쩍 가속페달을 밟았다. 뭉그적대던 기분이 상체와 함께 휘청 뒤로 젖혀졌다. 선글라스를 찾던 아내가 손을 흔들며 혼잣말을 던졌다. 그건 꼭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