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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Jun 14. 2018

빨래와 고양이,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는 슬라브어로 '참나무 숲' 이다. 원래는 낭떠러지세웠고 해서 라구(Ragusa 절벽)라고 불렀다. 도시가 이런 식으로 이름 붙는다면 곧 '빨간 지붕' 이나 '넘치는 햇살' 또는 '코발트 바다'로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팔뚝을 스멀스멀 오르는 바람과 따끔거리는 햇볕 속을 걸었다. 이런 오월은 처음이었다.


여행 전문가 권삼윤은 세계 곳곳을 돌아보고 《두브로브크는 그날도 눈부셨다》 라는 책을 썼다. 칠한 버나드쇼는 "지상 낙원을 보려면 두브로브니크로 오라" 했다. 바이런은 '아드리아해의 진주' 라고 불렀다. 아무리 표현해도 조금씩 부족했다. 두브로브니크를 설명하려면 무슨 형용사를 쓸까보다 어떤 말을 쓰지 말아야 할까를 더 고민해야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성벽을 걸었다. 발 아래 왼쪽 마을을 보았다.



붉은 색 지붕으로 뒤덮힌 두브로브니크 성벽안 구시가지


골목엔 빨래가 널려 있었다. 두브로브니크엔 유독 빨래가 눈에 많이 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나 부라노, 나폴리에도 빨래가 넘친다. 이곳은 더 하다. 이 사람들은 빨래 널기에서마저 오랜 앙숙인 이탈리아를 이기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프스 산맥 밑으로 햇볕이 풍부한 남부 유럽은 빨래를 집 밖에 널어 말리기에 딱 좋은 환경을 갖췄다. 그런데 빨래 널기는 나라마다 또 도시마다 다르다.

 

날씨가 끄물끄물한 영국이야 빨래를 밖에 널라고 해도 널지 않는다. 로마는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자기 집 발코니에서조차 빨래 널기를 금지한다. 대서양 너머 미국도 그렇다. 전체 가정의 80 퍼센트가 건조기를 쓰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웃의 반발이 더 무섭다. 까다로운 동네 할머니들은 빨래가 마을을 구질구질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집값을 떨어트린다고 생각한다. 빨랫줄은 건조기를 살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이나 쓴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벽을 따라 걷다가 왼쪽 발아래 구시가쪽을 내려다보면 어디서든지 빨래를 넌 풍경과 마주친다. 두브르브니크라면.


유럽의 빨래는 역사가 깊다. 1688년 영국 왕이 된 윌리엄은 쫓겨난 제임스2세 추종자 진압하느라 많은 돈이 필요했다. 처음엔 난로에 세금을 매겼다. 난로가 많으면 살림에 여유가 있다고 보고 세금을 더 거뒀다. 그런데 난로는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개가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만든 게 창문세였다. 창문은 밖에서도 셀 수 있으니 관리들이 어렵지 않게 세금을 물렸다. 여섯 개까지는  고, 일곱 개부터 중과세를 했다. 나중엔 창문 크기까지 따졌다. 돈 있는 집 발코니가 넓고 창문이 많았으니 그럴 듯한 셈법이었다.


사람들은 세금을 피하려고 창크기와 갯수를 줄였다. 새로 집을 지을 때는 아예 창문을 내지 않았다. 안 그래도 햇볕이 부족 영국 사람들은 더 우울해졌다. 뒤따라 창문세를 도입했던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 표트르 대제는 한술 더 떠 빨래세까지 만들었다. 그 결과 유럽의 마을에서 빨래하는 모습 보기 힘들어졌다. 창가에 널린 빨래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풍경 사라지기 시작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스르지산을 오르면 두브르브니크를 한 눈에 볼 수있다. 케이블카를 타는 대신 자동차로 산길을 오르면 가는 길 곳곳에서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에 차를 세울 수 있다.


두브로브니크반대다. 여기는 빨래 고양이가 넘친다. 다 럴만한 사연이 있다. 아드리아해의 관문인 두브로브니크는 예전부터 해상교역이 왕성하였다.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바닷길에 지친 쥐들이 하역 짐더미에 숨거나 배를 묶은 정박용 밧줄을 타고 부두로 상륙하였다. 항구엔 놀 것도 먹을 것도 풍부했으니 당연했다. 항구사람들은 골칫거리 쥐를 쫓기 위해 고양이를 들여왔다. 고양이는 식량은 건드리지 않고 쥐만 잡았다. 사람들이 다 좋아했다. 생쥐들은 부두질주하고 그 뒤를 빳빳이 꼬리를 세운 고양이가 어슬렁거렸다. 두브로브니크가 번성할 수록 고양이 소리가 항구를 덮었다.


이즈음 역병이 돌았다. 1374년 시작된 페스트는 1700년까지 100여 차례 발생하여 2천5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유럽 인구의 30 퍼센트에 달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두브로브니크의 의료보건장관 제이콥(Jaycob)은 드물게도 페르시아 의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염병엔 반드시 잠복기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림 엽서 같은 풍경은 어디서든 누구나 만날 수 있다. 날씨가 늘 좋은 편이라 두브르브니크는 여행자가 찾기에 마춤한 곳이다.


1377년 제이콥은 법령을 발포하였다. 항구로 들어오는 모든 외부인을 임시 격리소에서 40일 동안 머물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 기간동안 병색이 나타나지 않으면 뭍으로 들였다. 사람들은 이를 콰란티노(Quarantino)라고 불렀다. '40' 이란 뜻이다. 우리가 쓰는 검역 (quarantine)이란 단어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페스트란 이름도 목축업자 쓰던 말이었다. 병든 양의 발목을 묶어 돌아 다니지 못하게 하는 치료법이었다. 


두브로브니크는 바다에서 들어오는 전염병은 '콰란티노'로 걸러냈다. 부두에는 여전히 고양이가 진을 쳤다. 페스트를 옮기는 게 쥐란 걸 당시는 몰랐지만 고양이는 칙사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 또 한번 늘어나는 계기가 찾아왔다.


 

'600년 전 말썽꾼'이란 이름으로 두브로브니크 고문서 보관소에서 공개한 15세기 문서에 찍힌 고양이 발자국이 이곳에서 인기를 끈다.


1991년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는 유고 연방과 전쟁을 치렀다. 유고 해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두브로브니크 성벽 곳곳이 무너졌다. 골목엔 인적이 끊겼다. 유고 연방의 포화가 거세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 짐을 꾸렸다. 키우던 개도 데리고 두브르브니크를 떠났다. 하지만 고양이는 달랐다. 고양이는 남겨진 존재였다. 마을에 남은 몇 안되는 사람들은 남은 고양에게 먹이를 챙겨주었다. 그렇게 서로가 위로하고 또 의지하였다. 곁을 잘 내주지 않는 고양이 남은 사람들의 곤궁한 형편이 양 쪽에 다 편하게 작용했다.


포연짙은 어느 날 마을 사람중 누군가 빨래를 미처 걷지 못했다. 우연히 포탄은 그 집을 비켜갔다. 그걸 본 사람들은 다투어 창가에 빨래를 내다 걸다. 한  두 집 빨래가 늘어나자 이상하게도 대포소리는 줄었다. 사람들은 힘을 얻었다. 동시에 빨래는 희망이 되었다. 평화와 독립을 요구하는 두브로브니크의 빨래는 어떤 깃발보다 힘차게 펄럭였다. 빨래 덕분인지 공격이 뜸해졌다. 마침 프랑스 작가 장드로메송은 드브로브니크를 지키자며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호소했다. 사람들은 성벽을 따라 인간띠를 만들기도 했다. 포성멈췄다. 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빨래는 휘날렸고 고양이는 으스댔다. 돌아온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떠난 골목을 이들이 대신 지켜줬다고 생각했다.



두브로브니크에선 아무도 고양이를 홀대하지 않는다. 빨래도 마찬가지다.


1995년 전쟁이 끝났다. 사람들은 창문넘어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며 빨래를 널었다. 서로서로 맞은편 담벼락에 도르래를 박고 자기 집 창문까지 빨랫줄을 연결하였다. 그 도르래를 '티라몰라'라고 불렀다. 크로아티아 말로 티라(tira)는 '땅긴다' 몰라(mola)는 '밀다'란 뜻이다. 밀고 당기면서 정이 퍼졌다.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빨래가 남들에게 보이는 곳에 널린다는 걸 의식하면서 경쟁하듯 더 예쁘게 내걸기 시작했다. 일부러 담벼락에 어울리는 빨래를 고르고, 크기와 종류는 물론 색깔까지 맞춰 빨래를 널었다. 좁은 골목과 붉은 지붕 사이로 빨래가 널리면 고양이와 햇볕이 찾아 들어왔다. 이들을 반기듯 빨래가 퍼덕였다. 어떤 어려움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두브로브니크 사람들의 활갯짓처럼 보였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성벽을 걷다말고 나는 그만 빨래 찍느라 바졌다. 그런 나를 고양이가 빤히 올려다 보았다. 이제 이곳은 빨래와 고양이 천지가 되었다. 나는 두브로브니크를 '빨래와 고양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허공의 엔터 키를 꾹 눌렀다. 금방 <다른 이름으로 저장> 되었다. 



구시가지나 성벽 곳곳엔 이색적인 곳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도시외곽으로 나가보는 것도 좋다.


이대로 한 오십년쯤 지나면 도시 이름이 '빨래와 고양이'라고 바뀔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빨간 지붕'이니 '넘치는 햇살' 또는 '코발트색 바다'는 반나절 여행자나 떠올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도시는 사람이 모여서 만들지만 그것 만으로 아름다워지진 않는다. 고양이며 빨래 같은 디테일이 숨 쉬고 기에 아픈 역사가 덧입혀질 때 두브로브니크처럼 찬란해지는 모양이다. 도시도 사람처럼 자기 서사(敍事)가 필요한 것이다. 삶의 뿌리가 단단해지고 또 생명력을 가지려면 말이다. 정말이지 이런 오월은 처음이었다.












posted by chi





두브로브니크, 5423계단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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