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3년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카(Alphonse Karr)가 노르망디의 바다, 에트르따(Etretat)를 두고한말이다.
바다를 이토록 멋지게 표현한 말이 있던가. 궁금했다. 도대체 어떻길래. 모파상이 이름 붙였다는 '코끼리 바위'쯤이야 흔한 건데. 갸우뚱했다. 그런데 달랐다. 에트르따는 절벽, 교회, 바다, 파도, 자갈, 풀밭, 하늘, 구름 모든 게 특별했다.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풍경. 변화무쌍한 5월 날씨. 거친 파도. 그 험한 바다로 들어가는 코끼리. 세상의 여러 바다를 나름 섭렵했지만 에트르따에서 나는 겸손해졌다.
얼마전까지 이곳은 청어와 고등어를 잡는 바닷가 마을에 불과했다.1850년 이후 프랑스에 부르주아가 자리잡고 '바캉스' 따위 개념이 생기자이곳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쿠르베, 모네, 부댕, 시슬리, 마티스가 여기를 찾아왔다. 에트르따는 영감을 부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 무엇이 예술가 여럿을 키워냈다.
앙드레지드는 1895년 여기서 결혼식을 올렸다. 모파상은 에트르따를 무대로 '여자의 일생'을 썼다. 모리스 르블랑은 코끼리 코앞 바위를 괴도 뤼팽의 '기암성'이라 불렀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도 있었다. ‘레 미제라블’의 빅토르 위고,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사무엘 베케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푸르스트도 여기서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노르망디의 바다는 거의 흐리다. 사실 맑은 날은 오히려 에트르따 답지 않다.
내가 아는 서양미술사는 인물화의 역사다. 동양화가 산수화 위주였던 것에 비하면 많이 다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풍경화가 있긴 했지만 초상화나 종교화의 배경에 불과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멀리하는 기독교 가치관이 자연을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풍경이 주인공이 되려면 19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쿠르베가 등장했다.
쿠르베(1819-1877)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그렸다. 당시에 퍼져있던 낭만주의 회화에 등을 지고 일상적인 사건을 그림 주제로 선택했다. "천사를 보여달라. 그럼 천사를 그리겠다"는 사실주의자였다. 나이가 들자 그는 바닷가 산 계곡 같은 풍경화로 범위를 넓혔다. 그런 쿠르베가 에트르따에 왔다. 그리고 에트르따의 바다와 절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왼쪽 귀스타브 쿠르베. 오른쪽 <폭풍우가 지나간 에트르따 절벽>
나중에 등장한 모네가 절벽 풍경을 빛에 녹은 것처럼 그렸다면 쿠르베는 대상 하나하나에 명확한 물성을 부여하였다. 쉽게 말하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 맑은 하늘, 투명한 물빛을 치밀한 시선으로 표현했다. 이 때문에 쿠르베가 그린 풍경은 신화적이지 않고 영적이지도 않다. 대신 자연 자체가 지닌 사실과 장엄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1870년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는 ‘폭풍우가 지나간 에트르따절벽'을 완성했다.
모네에게 인상파란 이름을 붙여준 <해돋이-인상> 평범한 구도, 빛과 그림자, 대기의 실감, 희미한 경계. 나는 인상파의 도래를 예감했다.
그리고 모네(1840-1926)가 나타났다. 모네는에트르따 바다에 사로잡혀 50점이 넘게그렸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날 같은 시간같은 장소에서 다시 그렸다. 모네는 이젤을 놓고 몇 시간이고 바다를 관찰하였다. 바다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햇빛의 각도와 물 반사, 바람의 움직임, 공기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 그 바다를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했다.
모네는 매번바다를 그리면서 고심했다. 마침내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바다가 아니라 빛에 따라, 또 자기가 받는 인상에 따라 변화하는 바다를 창조했다. 빛과 공기를 섞어 윤곽선을 뭉개버린 해변, 솟구치는 물결, 구름 한 점, 절벽의 울퉁불퉁함이 그랬다.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원칙이 세워졌다.1883년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에트르따 절벽의 일몰'을 내놓았다.
클로드 모네. 모네의 <에트르따 절벽의 일몰>
나는 쿠르베보다 모네에게 끌렸다. 모네는 흐린 날 바닷가에서 배를 정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어부. 에트르따의 절벽에 거칠게 부딪히는 파도와 몰아치는 바람. 잿빛 하늘과 축축한 추위. 안개 낀 날을 주로 그렸다. 모네에게선 자연에 맞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단한 삶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보였을까.
모네가 그린 에트르따의 바다 여러 모습
노르망디의 바다가거칠고 험하기 때문일까.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알고 보니 이 그림을 그릴 때 모네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1879년 모네는 아내 카미유(Camille)를 잃었다. 모네는 어린 두 아들을 혼자 돌볼 수 없어 자신의 후원자인 에르네스트 오슈데(Ernest Hoschedé)와 함께 살게 되었다.
오슈데는 모네가 그린 '해돋이-인상'을 사줬던 부유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그때는 사업이 파산하는 바람에 호주머니가 거덜난 상태였다. 두 가족이 동거하면서 모네와 오슈데의 아내 알리스(Alice)는 눈이 맞고 만다. 불륜이라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달은 것이다. 아내와 모네 사이를 눈치챈 오슈데는 집을 나갔다.
모네가 그린 에트르따의 거친 바다. 모네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모네는 자신의 두 아이, 그리고 알리스의 여섯 아이까지 합친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그림을 그렸다. 집을 나갔던 오슈데는 가끔 알리스를 찾아와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사정했다. 차마 오슈데를 마주할 수 없었던 모네는 그때마다 이젤을 챙겨 에트르따의 바다로 향했다.
세찬 파도를 맞으며 꿈쩍 않고 서 있는 에트르따의 절벽.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와 부서지는 물거품. 바람에 몸을 뒤뚱이며 끼룩끼룩 우는 갈매기. 모네의 심정은 붓칠하는대로 고스란히 캔버스로 옮아갔다.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바다를 향해 괜한 돌팔매를 날렸다.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notre dame de la garde). 이 교회는 선원들의 수호성인으로 주로 바닷가의 높은 곳에 세워져 어부들에게 위안을 준다.
작은 교회가 있는 언덕, 팔레즈 다몽(Falaise d'Amont)에 올랐다. 코끼리 바위와 기암성이 있는 팔레즈 다발(Falaise d'Aval)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 언덕은 이곳만이 내어주는 시야와 상념 때문에 특별하다. 절벽 끝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흰색 해안이 구분 짓는 마을과 바다. 찰나의 색감. 초목이 움직일 때만 드러나는 바람.그 바람에 섞인 바다 내음. 또 있다. 자살을 결심하고 절벽 위에 선 '여자의 일생' 잔느. 기암성으로 건너 뛰는 뤼팽이 겹쳐졌다. 바람이 불자두런두런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실려왔다.
팔레즈 다몽에서 코끼리 절벽을 보는 여인. 코끼리 절벽에서 아기 코끼리를 배경으로 앉은 연인
알퐁소 카가 말했다. "사람들은 장미꽃에 가시가 있다고 불평하지만 나는 쓸데없는 가시나무에 장미꽃이 핀 것을 오히려 감사해" 마르셀 푸르스트가 입을 열었다. "여행에서 얻는 건 낯선 풍경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이지" 모네는 무거운가슴을쓸어내리며 붓칠만 했다.두껍게 두껍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