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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Jul 12. 2019

담보로 잡힌 몽생미셸

프랑스




"사막에 피라미드가 있다면 바다 몽생 미셸이 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몽생미셸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몽생미셸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 찾아가더라도 가장 비현실적인 얼굴로 방문객을 맞는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꼭 한번 가봐야 할 순례지 몽생미셸. 이 아름다운 바닷가 수도원이 통째로 모기지론 담보로 잡혔던 적이 있다. 1096년 일이다.


모기지(mortgage)란 랑스죽음(mort)서약(-gage)을 합친 말이다. 글자만 보면 '죽음을 서약하고 돈을 다'라는 미이다. 얼추 그래 보이긴 하지만 사실 더 깊은 내가 있다. 중세 영주의 뚤어진 아들이 저잣거리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 돈이 떨어지면 전당포 찾아가 이잣돈을 빌렸다. 이때 '아버지가 죽으면 물려 받을 상속재산으로 갚겠다'고 약속했다. 이게 모기지래 뜻이다.



프랑스가 만든 소형 SUV '르노 캡처'. 나는 갓잡은 생선에 칼을 넣어 배를 가르듯 노르망디 평원을 두 동강 내며 달렸다.


나는 몽생미셸과 옹플뢰르에서 이틀씩 나흘 간 머물렀다. 대부분 파리에서 당일 치기로 노르망디를 구경하는 패키지여행을 선택한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빠듯해도 이곳을 반나절만 둘러보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몽생미셸과 옹플뢰르 풍경은 그야말로 노르망디 여행의 '고갱이'이기 때문이다.


이틀 내내 나는 저녁마다 노르망디 하늘  걸어 몽생미셸에 닿았다. 어둠에 사위가 불분명해지면 몽생미셸은 자신의 허리께며 어깻죽지 또는 정수리에 불을 밝혀 낮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건 스무날 프랑스 여행에서 마주치는 가장 황홀한 순간이었다.



해가 지거나 검푸른 바닷물이 들어오거나 불을 밝히면 몽생미셸은 그것들로 인해 더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다.


몽생미셸(Mont st. Michel). 직역하면 '미카엘 천사의 바위산'. 어 때 먹던 과자 몽셸통통(mon cher tonton)은 '나의 친애하는 삼촌'이란 뜻으로 이곳과는 관련이 없다.


미카엘은 사탄에 맞서 일격을 가한 힘센 대천사(St. Michael the Archangel)를 가르키는 말이다. 종종 저울을 든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영혼의 무게를 재어 선과 악을 심판하는 천사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뜻으로 성당 이름에 미카엘을 가장 많이 다고 한다.


수도원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시 숲 (Foret de Scissy) 가운데 솟아있던 높은 바위산이었다. 어느 날 커다란 파도가 려와 숲을 삼켜버리고 바위산은 바다에 뜬 섬이 되었다.



대천사 미카엘. 오베르 주교가 미카엘 대천사로부터 계시를 받는 모습. 수도원 꼭대기에도 미카엘 천사의 모습을 한 피뢰침이 달려있다. 천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몽생미셀을 지킨다.


708년 아브랑슈의 주교 오베르(Aubert)의 꿈에 대천사 미카엘이 나타나 이곳에 수도원을 지으라는 계시를 주었다고 한다. 주교는 바위섬에 수도원을 짓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그 꿈을 무시했다. 두 번째 비슷한 꿈도 흘려보냈다. 


세 번째 꿈에 다시 나타난 미카엘 천사는 당황하는 주교의 머리에 손가락으로 강한 빛을 쏘았다. 잠에서 깬 오베르는 실제로 자기 이마 한쪽이 움푹 들어간 것을 져보고 그제야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다. 금도 아브랑슈 박물관에는 구멍난 오베르 주교의 해골이 전시되어 있다. 그렇게 지어진 몽생미셸 노르망디 지배세력과 적절한 줄다리기며 용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중세 마을이 만들어지려면 꼭 필요한 세 가지가 있었다. 그 셋은 공동묘지, 성당, 빵집이었다고 한다. 먹고 기도하고 죽는 일이 결국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인 모양이다.


노르망디는 '북쪽 사람(north man)이 사는 땅(di)'이란 뜻이다. 북쪽 사람이란 8-9세기 프랑스 해안에 출몰하던 덴마크 바이킹을 가리킨다. 이들은 800년부터 센강을 오르내리며 노략질을 거듭하다 845년 파리를 포위하기도 했다. 911년 프랑스 왕 샤를 3세는 이들의 침략에 시달리느니 땅을 주고 뭍에 올라 살도록 허락했다. 대신 조건을 붙였다. 첫째 프랑스 말을 배울 것. 둘째 프랑스 왕에게 신하가 될 것. 바이킹 우두머리 롤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노르망디 땅을 받 로베르(Robert) 백작이 되었다.  


노르망디에 정착한 후 배짱 두둑한 후손이 태어났다. 로베르의 손자뻘인 기욤(Guillaume)이었다. 노르망디에 만족하지 못한 기욤은 바다 건너 잉글랜드를 욕심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잉글랜드를 공격해 해럴드 2세를 죽이고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였다. 잉글랜드 왕 윌리엄(William) 1세가  것이다. 바야흐로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가 작했.


정복왕 윌리엄과 눈에 화살을 맞고 죽는 잉글랜드 왕 해럴드 2세 모습이 유명한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묘사되어 있다.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점령하자 대륙 문화가 건너갔다. 예를 들  돼지는 영어로 카우(cow) 피그(pig)라고 불렀다. 그런데 요리 비프(beef) 포크(pork)는 불어를 쓰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건너간 노르만족이 프랑스 요리를 즐기자 불어가 자연스레 영어를 밀어낸 까닭이다.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한 손에  정복왕 윌리엄은 아들 넷을 두었다. 큰아들 로베르 2세가 세습지 노르망디를 물려 받았다. 둘째는 일찍 죽고, 셋째 윌리엄 2세는 정복지 잉글랜드를 상속 받았다. 세습지와 정복지를 구분하여 나눠주는 건 당시 봉건제도 관습이었다. 노르망디를 물려받은 첫째는 잉글랜드에 더 욕심이 났지만 아버지 뜻을 거스르기엔 힘이 부족했다. 넷째 아들 헨리는 영국 왕이 된 셋째 윌리엄 2세를 따라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영국 왕위를 물려받은 셋째 윌리엄 2세와 당시 노르망디 지역. 1세니 2세니 하는 건 후세 사람들이 구분하기 위해 붙인다. 당시 사람들은 '정복왕' 윌리엄처럼 별명을 불렀다.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양쪽에 재산을 가진 귀족들은 이쪽저쪽에서 각 다른 군주를 모셔야 하는 게 불편했다. 누구든 한 사람 통일했으면 싶어 은근히 싸움을 부추겼다.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는 이들을 구스르거나 때로 박지면서 세력다.


1091년 윌리엄 2세 형이 다스리던 노르망디로 쳐들어와 상당 부분 점령해버렸다. 그리고는 형제끼리 싸우지 말고, 프랑스 왕으로부터 노르망디 영토를 확실하게 보장받자고 설득했다. 둘 사이에 어정쩡한 평화가 찾아왔다.



몽생미셸은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매년 350만 명이 찾아온다.


그즈음 몽생미셸은 베네딕트 수도회 수중에 들어갔다. 베네딕트회는 엄격한 수련에만 집중할 뿐 다른 교파와 달리 세를 불리거나 누구 편도 들지 않아 오베르2세나 윌리엄2세로부터 트집 잡힐 일이 없었다.


1096년 노르망디를 통치하던 형 로베르 2세가 돌연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로 했다. 4차 십자군 원정이다. 로베르는 잉글랜드 왕이자 동생인 윌리엄 2세에게 노르망디를 담보로 잡히고 은화 1만 마르크를 빌렸다. 남한 면적 1/3 크기인 노르망디를 통째 저당 잡혔으니 역사상 최대 규모 모기지 론이었다.



몽생미셸과 마을사이의 풀밭은 양떼들 차지다. 매일 오전 9시가 되면 동네 양떼들이 도로를 건너 들판으로 갔다가 오후 5시에 축사로 돌아오는 장관을 연출한다.


당시 유럽 귀족은 자신 소유한 영지에서 나오는 농작물과 세금이 소득의 전부라 늘 현금이 부족했다. 큰돈이 필요할 때는 땅을 돈 많은 제후에게 담보로 맡기고 현금을 빌리는 일이 잦았다. 모기지론이 11세기에  퍼졌다는 이야다. 


형 로베르 2세가 원정을 떠나자 잉글랜드 왕인 동생 윌리엄 2세가 섭정을 맡아 노르망디까지 다스렸다. 윌리엄 2세 4년 가까이 노르망디를 통치했다. 또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메인 지역을 빼앗아 땅을 더 넓히기까지 했다. 1100년 8월,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브로켄허스트 근처 숲에서 사냥하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



몽생미셸은 프레살레(pre sale)라는 양고기가 유명하다. 바닷가의 짠 풀을 뜯어먹고 자라 스테이크에 따로 소금을 칠 필요가 없다. 실제로 먹어보니 그랬다.


윌리엄 2세가 죽 한 달 후로베로 2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왔다. 그 사이 막내 헨리가 죽은 윌리엄 2세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에 즉위해 버렸다. 화가 난 로베로 2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뺏으려고 헨리를 공격하지만 그만 사로잡 되려 노르망디 공국을 잃고 만다. 이후 잉글랜드 왕이 대대로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을 겸하게 되었다. 이는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1337년 -1453년)의 한 원인이 되었다.


몽생미셸은 그사이 이런저런 증축을 거듭하여 굳건한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백년전쟁 중에는 프랑스 군 요새로 쓰였으며 나폴레옹 시대에는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되다가 1863년에 와서야 다시 수도원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잔 다르크는 백년전쟁을 치르는 동안 몽생미셀이 한 번도 영국 손아귀로 떨어지지 않는  보고 기백배했다고 한다.



미트라(Mitra)는 주교가 의식  때 쓰는 모자다. 젊은 사제와 수녀들이 스마트폰을 꺼내 주교와 연신 인증샷을 찍어댔다. 주교는 셀카요청을 다 받아줬다


오늘은 5월 1일. 몽생미셸 수도원은 관광객을 들이지 않고 미사 참석할 사람만 장을 허락했다. 내겐 더 좋았다. 수도원으로 오르는 통로는 '마법의 성'으로 초대받는 느낌이었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만든 입구를 지나자 하늘을 향해 뻗은 돌계단이 반원을 그리며 끝없이 이어졌다.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예배당이 의연한 모습으로 반겼다.


돌바닥었지만 마치 누군가의 무릎에 걸터앉은 안했다. 사제와 수녀, 복사와 여행자가 하나 되어 는 미사. 뭉클했다. 흰옷을 입은 수녀 만드는 찬양과 헌신 릿한  뒷머리 잡아챘다.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는 양 팔 높이 들 테러로 얼룩진 세상 사랑과 평화 내리기를 기도했다. 훔쳐본  사람의 눈사위가 붉어졌다.


어느덧 미사가 끝났다. 황홀한 심정 돌계단을 걸어 내다. 신부의 마지막 기도 메아리가 되어 귓전을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발되지 않은 음성은   되어 달팽이관.


"엇을 위해 무릎 꿇은 적 있느냐"

"너는 군가를 위해  손 모은 적 있느"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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