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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Jul 17. 2019

한양 땔감을 싹쓸이한 쁘레상 형제

프랑스




"커피가 독약이라면 그것은 천천히 퍼지는 독약이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하루에 커피를 열두 잔까지 마시는 지독한 커피 애호가였다. 그가 커피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카페의 전형이라는 카페 '르 프로코프'를 찾았다. Le Procope, 13 Rue de l'Ancienne Comedie, 75006 Paris


1789년 프랑스에서 커피는 파리 시민의 가슴을 흔들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프랑스 혁명에 중물다. 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온 '고양 부씨', 프랑스 형제는 커피 한 사발로 도성 인근 나무장수를 죄다 중독시켜 종로통 땔감 시전을 마비시켰다.


노란 조끼 시위대를 피해 지막이 파리 도착한 나는 1686년 문을 연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르 프로코프(Cafe Le Procope)를 찾았다. 가 자리앉아 뜨거운 알롱제(Allonge)프랑스와 조선의 커피를 생각했다.


1901년 프랑스 형제, 뽈 쁘레상(Paul Plaisant)과 안톤 쁘레상(Anton Plaisant) 조선에 들어왔다. 한 해 전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고종의 초상화가 걸린 '조선관'을 보고 나서였다. 쁘레상 형제는 기회의 나라, 조선으로 가는 배를 물색했다. 이듬해 한양에 도착한 형제는 몸을 추스르자마자 돈 될 일을 찾아 나섰다. 당시 한양에서 가장 잘 팔리는 게 나무 땔감이라는 것을 알고 바로 나무 장사를 시작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문을 연 조선관 모습.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전경


쁘레상 형제는 육조거리 입구, 즉 지금의 세종로에서 커피를 담은 화살집만 한 보온병을 들고 새벽부터 진을 쳤다. 아침 일찍 창의문과 무악재를 넘어 나무 팔러 오는 지게꾼을 발견하면 쪼르르 달려가 "고양 부씨입니다" 라고 말을 붙였다. 어리둥절하는 나무꾼에게 얼른 커피 한 사발을 따라 안겼다. 그리고 그들이 지고 온 나무 등짐을 냉큼 받아 한쪽에 쟁였다. 땔감 삯도 후하게 쳐줬다. 나무꾼은 서양인이 끓여주는 국이라고 해서 커피를 '양탕국'이라 불렀다.


며칠 후 쁘레상 형제는 쌓아놓은 나무 땔감에 이문을 붙여 지금의 종로통인 운종가로 넘겼다. 땔감은 옷감이나 종이, 생선처럼 육의전에서 관리하지 않아 얼마든지 사재기할 수 있었다. 나무꾼은 처음엔 몸에 좋은 한약인 줄 알고 커피를 받아 마셨다. 입에 쓸수록 보약이라고 들은 것도 있던 참이었다. 나중에는 커피에 인이 박여 집에 있던 땔감마저 챙겨 쁘레상 형제를 찾았다. 그 덕에 1900년대 초반, 한양 땔감 절반 쁘레상 형제 손에 들린 보온에서 놀아났다고 한다.



소등에 뗄감을 실은 나무장수와 땔감지게를 진 나무꾼. 서양인들과 양반이 한데 어울려 가배를 즐기는 모습.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해 있을 동안 러시아 공사 '웨베르'로부터 커피를 배워 '가배'라 부르며 즐겨 마셨다고 한다. 이것이 조선 양반층에 번진 커피라면 '고양 부씨'라고 둘러댄 쁘레상 형제가 육의전 길을 따라 나무꾼과 장돌뱅이에게 탕국을 퍼뜨린 셈이다.


우리나라 어른 한 사람이  해에 커피를 336잔이나 마신다는 관세청 통계를 보면 쁘레상 형제 나무 등짐보다 커피 장사를 하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 했.



이스탄불의 커피 하우스. 커피가 유럽에 전해지는 경로


커피가 유럽에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무렵. 그전까지 커피는 아랍 사람애용한다 해서 '악마의 음료'로 금지하였다. 미식가 교황 클레멘스 8세커피를 맛본 후 이 멋진 음료를 이교도마시도록 놔 수는 없다며 '기독교도의 음료' 르는 세례 해줬다고 한다.


1669년 커피가 파리에 들어왔다. 파리 주재 오스만 제국 대사 술레이만 아가 (Suleiman Aga)는 거대한 저택을 빌려 으리으리하게 꾸며놓고 파리 셀럽초청했다. 고급 군인과 , 고위 관직 부부는 술레이만이 불러주기를 목이 빠라 기다렸다. 술레이만이 건네주는 이슬람 물건 중에 커피는 단연 인기였다. 쓰디쓴 커피 한 모금에 귀부인은 남편이 지휘하는 군대 편성, 정부 주요 인사 동향을 자신도 모르게 술술 풀어놓았다. 설탕을 건네면 달콤한 정보가 더 쏟아졌다. 술레이만은 루이 14세의 궁정을 훤히 파악해 오스만 제국에 낱낱이 보고했다.



네들란드 화가 Carle Van Loo가 그린 오스만제국 귀부인이 흑인 노예로부터 커피를 받아 즐기는 모습


"황금 자락이 긴 옷을 입은 흑인 노예가 금으로 수놓은 쟁반에 계란 껍질처럼 얇은 일본 자기 놓고, 뜨겁고 진한 모카커피를 담아 무릎 꿇고 올렸다. 호기심 많은 귀부인은 지옥처럼 검은 음료에 빨간 립스틱으로 칠한 입술을 대었다가  맛에 놀라 얼굴을 찡그리고는 부채질을 해댔다"


영국 역사가 아이작 디스렐리(Isaac Disraeli)는 술레이만이 여는 커피 파티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즈음 파리 사교계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는 커피를 어떻게 우려내야 하는가였다.



카페 르 프로코프의 내부. 현관을 들어서면 이층으로 올라가는 화려한 계단이 눈 앞에 나타난다. 좌우로 레스트랑과 커피 마시는 룸으로 나뉜다.
르 프로코프 2층에는 볼테르가 프러시아 프레데릭 왕으로부터 받은 대리석 테이블이 있다. 나폴레옹이 중위 시절 외상값대신 맡긴 모자가 1층에 전시되어 있다.


카페 프로코프는 지하철 오데옹 역에서 걸어 5분 거리였다. 문을 여니 식사를 할 건지 차를 마실 건지 물었다. 이곳은 아직 화려한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벽에 걸린 거울이며 촛대, 대리석으로 만든 테이블 상판은 유럽 카페의 '럭셔리' 기준이 되었다. 프로코프가 만든 세련된 분위기에 잘 나가는 파리 엘리트들이 몰렸다. 루소(Rousseau), 볼테르 (Voltaire), 디드로(Diderot)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가 드나들었다. 청년 장교 나폴레옹도 단골이 되었다. 디드로는 여기서 최초의 백과사전을 집필하였다. 카페 프로코프가 입소문이 나자 파리에만 비슷한 카페 2천 개가 문을 열었다.


이곳은 홍차와 커피를 반반 섞은 커피를 내놓아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내가 '반반 커피'를 주문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싱긋하는 눈웃음과 "그런 건 없다" 다. 나 같은 사람이 종종 있는 눈치였다.



프로코프의 예전 모습. 볼테르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카페에서 토론을 즐기는 모습.


파리 카페는 프랑스 시민혁명이 잉태된 곳이기도 하다. 1789년 7월 13일, 팔레 루아얄에 있는 카페 드 푸아(Cafe de Foy)에서 혁명가 카미유 데물랭(Camille  Desmoulins)테이블에 올라섰다. 한 손에 긴 칼을 다른 한 손에 권총을 쥐고 그곳에 모인 부르주아지 친구들에게 외쳤다. "제군이여, 무기를 들어라"  다음 날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졌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사람들이 카페에서 나올 때면 들어갈 때 보다 네 배 이상 지성을 갖게 다고 했다. 고흐는 사흘간 같은 자리에 앉아 커피만 마시며 '밤의 카페'(Café de Nuit)를 그렸다. 두 달 뒤 폴 고갱은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그림을 그렸다. 프랑스에서 카페는 예술가의 낙원이자 문학가의 서재였으며 사상가의 토론장로 나날이 번창했다.



카페 프로코프의 메뉴와 내가 주문한 두번 째 커피


커피 한 잔을 다시 주문했다. 카페인이 위 벽을 타고 떨어지자 모든 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피곤은 달아나고 생각이 들끓었다. 손가락은 렸다. 이걸 마시면 오늘 밤이 영 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프랑스 미식가 브리아 샤바랭(Jean Anthelme Brillat Savarin) 한 말에 느새 의하고 있었다.


"커피가 주는 불면은 고통스럽지 않다. 못 자는  아니라 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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