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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Jul 29. 2019

기차역은 하필 미술관이 되었을까

프랑스




"오르세에서 가장 나는 예술작품은 오르세, 바로 그 자체다"


파리 사람들은 기차역이 변신하여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오르세(Musee d'Orsay)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오르세는 한복판의 높고 긴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작품들이 걸려 있다. 이 통로는 과거에 철로가 있던 자리다. 여기에 마치 미술사의 새로운 출발역인 양 미술관이 들어앉았다.



기차역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1층 공간. 건너편 가운데 걸린 커다란 벽시계는 기차역 시절에도 걸려 있었다.


나는 오르세를 볼 때마다 어떻게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바꿀 생각을 했을까. 건물에도 풍수와 도참(讖)에 따라 운명이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인상파 화가도 만날 겸 궁금증을 풀 실마리도 얻을 겸 오르세를 찾았다. 마침 파리에 한 주나 머물게 되어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겼던 터였다.


파리를 흐르는 센 강. '왕의 다리'라 불리는 퐁 루아얄(Pont Royal)을 사이에 두고 강 한쪽은 오르세, 다른 한쪽은 루브르가 자리 잡다. 둘 다 최고의 미술관이다. 나는 며칠째 오르세를 들락거렸다. 루브르보다 오르세가 더 땡겼다. 오르세에는 마네, 모네, 세잔, 르누아르, 드가, 고흐, 고갱, 로트렉까지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이 마치 생맥줏집 흔한 달력처럼 걸려 있다. 이곳은 도대체 지루하기 쉽지 않다. 내가 이렇게 미술에 조예가 깊었나 싶을 정도로 눈에 익은 그림 가득하기 때문이다.



센강 건너편에서 본 오르세 미술관. 강 옆이라 그런지 유람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르세는 원래 기차역이었다. 프랑스는 1900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박람회장까지 사람을 실어나를 방법을 고민하였다. 4월부터 11월까지 열 박람회장을 을 것으로 예상되는 관람객은 무려 5천만 명. 정부는 파리 외곽에서부터 박람회장까지 철도를 깔고 마침 화재로 버려진 재판소 부지에 기차역을 짓기로 했다. 오르세였다.


19세기 유명 건축가 빅토르 랄루(Victor Laloux)가 나섰다. 랄루는 역 정면을 모두 석조로 만들었다. 내부에는 에펠탑보다 많은 철근 12톤을 넣고, 리를 3만 5천 붙여 햇빛을 최대한 끌어들였다. 천장은 로마 성당 본떠 둥글게 다.  전기로 움직이는 승강기를 화물용 여객용놓아 유럽 최초의 전기구동식 역으로 들었다. 사 남쪽엔 방이 370개나 되는 루이14세 양식 호텔 지어 누구든지 머무를 수 있 하다.



오르세가 기차역으로 지어질 때(왼쪽). 기차가 드나드는 플랫폼(오른쪽). 오르세 역은 일방통행식이었다. 승객을 태우고 뒷걸음질로 나가 교외의 본선에 합류해서야 앞으로 달렸다


오르세 역은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1900년 7월에 열었던 문을 1939년에 닫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1939-1945)으로 기차 운행이 멈춰 어쩔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났어도 역을 다시 열지 못했다. 역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증기로 움직이던 기관차는 객차 열 량을 끄는 게 전부였다.  그 사이 기관차가 힘센 디젤 동력으로 바뀌었다. 객차를 더 붙여 기차가 길어지자 오르세 역의 짧은 플랫폼이 볼품 사나워져 버렸다. 증축이 불가능한 역은 쓸모가 줄어들었다. 오르세는 천천히 버려졌다.


1970정부가 '문화'을 할 때 오르세가 눈에 밟혔다. 1986년 미테랑 대통령이 개관 테이프를 끊으며 오르세는 미술관이란 이름표를 달다. 나는 전히 의아했다. 기차역이 고 많은 것  하필 미술관으로 변을까 .



고려시대의 역참 모습(왼쪽). 오른쪽은 프랑스화가 '오라스 베르네'(Horace Vernet)  <역참에서 말 교환> 1830년 작


역(驛)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전부터 존재하였다. 역은 말이나 마차를 타는 곳, 먼 길을 달려온 말과 마차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곳, 또 여행자가 쉬며 기력 회복하는 곳이었다. 파발(擺撥)이라 하여 통신을 전달하는 수단으로도 쓰였다. 조선 시대는 30리마다 역참(驛站)을 설치했다. 그곳에 원(院)을 두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시간과 거리를 가리킬 때 '한 참(站) 걸린다' 는 말은 '다음 역까지 가는 거리다' 라는 뜻이다. '역전(驛傳) 마라톤'은 '다음 역까지 전달하러 달린다'라는 의미다. 즉 역이 하는 기능은 운송, 통신, 휴식에 있다. '운송'을 잃어버린 역이 다음으로 할 일은 '통신' 이나 '휴식'이란 본성에서 찾아야 한다.       

                                       


제2차 대전 중 우편집중국으로 쓰였던 오르세(왼쪽). 전쟁 후 전쟁포로들의 임시 수용소로 쓰였던 오르세(오른쪽)


2차 대전이 터지자 오르세는 전시 우편취급하는 우편집중국으로 쓰였다. 두 번째 본성, '통신' 기능한 것이다. 놀랐지만 러려니 했다. 겁한 것은  음이었다.  오르세는  포로가 머무는 임시 거처로 용되었다. 당장 갈 곳이 마땅찮은 포로들은 이곳에서 기력을 되찾은 뒤 원하는 곳으로 송환되는 절차를 밟았다. 번엔 역의 세 번째 본성인 '휴식' 역할. 가 써놓고 내가 기했다. 오르세 한쪽에 전쟁 포로 수용소였다는 실을 적은 동판 보고 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야 했다.

                                                                                                                                                                       

이쯤 되니 오르세 기차역이 미술관으로 변신한 것은 당연해 보였다. 일상에 쫓기는 파리 시민에게 예술가의 작품으로 위로하는 역할. '휴식'이란 본성이 요즘 세상에 맞게 그럴듯한 형태로 구현되는 곳이 바로 오르세 미술관이지 싶었다. 나도 내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풀리지 않은  하나 남아 있었다. 오르세가 인상파 화가 작품을 주로 소장하 된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라금함이었다. 다시 생각에 잠다.



1860년대 파리 철도 노선, 외젠 쿠르브앵이 그린 파리 최초의 철도(가운데), 1870년대 파리 철도노선


1841년 튜브에 든 유화물감이 다. 국 화가 존 랜드가 발명했고, 1850년대부터는 상용화되었다. 일일이 천연재료에서 물감을 추출해 쓰던 시절에는 그림을 바깥에서 그는 게 쉽지 않았다. 돼지방광에 유화물감을 넣어 들고 나가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물감이 타나 화구 재료를 휴대하기 지자 화가들은 하나 둘씩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다. 특히 순간적인 빛과 대기의 움직임을 포착해야 했던 인상파 화가들에게 더할 나위 없었다. 여기에 리를 놔준 게 철도였다.


1832년 프랑스 산업 거리 철도 처음으로 다. 1850년 부터 파리를 가는 여객 철도 나 둘 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시작 1860년 경 파리를 중심으로하는 교외 철도망 부분 완성다. 인상주의가 끝나는 1905년 쯤에는 프랑스 전역 촘촘 거미줄처럼 연결시켜 어디든 갈 수 있는 철도망 다.



오르세는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을 인상파 화가 최고의 수작으로 꼽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휴대용 물감과 젤을 챙겨 기차다. 초기 화가들은 파리에서 멀지 않은 북쪽 노르망디 해안을 찾았다. 그들은 빛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세상눈에 보이는대로 묘사하 싶다. 그들에게 기차역은 상주 세계 들어가는 출발점이자 마침내 닿을 종착지였다.


파리 근교로 가는 생 라자르(St. Lazare) 역엔 베레모를 쓴 화가들이 단골로 나타났다. 1877년 을, 모네는 역장 찾아가 모든 기차를 플랫폼에 세우고 연기와 수증기를 내뿜도록 부탁한 적도 있다. 역장은 한술 더 떠 승객의 출입 다. 모네의 <생 라자르 역 : 기차의 도착>이 탄생한 일화다.



모네는 1876년부터 생 라자르 역을 주제로 하는 10여편의 그림을 그렸다. 1877년 발표한 <생 라자르 역 : 기차의 도착>이다.
모네가 생 라자르 기차역과 그 주변을 그린 연작들.


오르세 인상주의 작품을 주로 소장한 이유 보였다. 생전의 들이 자연리기 위해 기차 사적으로 이용했던 만큼 그들이 남긴 작품 기차역, 오르세 찾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창문을 많이 달아 햇볕을 부하게 도 빛는 뗄레야 뗄 수없는 인상주의 특징과 아귀가 잘 맞았다. 


렇게 설명하는 도슨트(Docent)  사람없지만 인상주의 기차역의 찰떡 궁합이 오르세만큼 맞아 떨어지는 곳도 었다.


며칠간의 오르세 탐방을 마쳤다. 오르세에 관한 생각 거듭하다 지난 가을 포르투갈 여행이 떠올랐다. 맞다. 그곳에도 기차역이 미술관으로 진화  증거 다.


포르투갈 포르투(Porto)에 있는 상벤투 (São Bento) 역이다. 이곳은 2만여 개 타일로 포르투갈 역사를 묘사한 아줄레주 (azulejo) 벽화가 유명하다. 상벤투 역은 이미  이상 미술관으로 넘어왔다. 곳을 찾는 사람 대부분은 기차를 타기보다 건물과 벽화를 감상하러 오기 때문이다. 독일에도 슷한 증거가 있다. 1996년 개관한 베를린함부르크 반호프(Hamburger Bahnhof) 미술관 기차역이 미술관으로 진화한 최근 사례다. 



베를린의 함부르크반호프 미술관, 포르투의 상벤투 역(가운데), 파리의 La Recyckerie는 기차역을 개조한 레스토랑이다. 역의 본성 중 '휴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오랜 화두를 남겼다. 기능에 맞게 건물 형태를 축해야 한다고 풀이하지만 오르세를 본 나는 이 말 다르게 가왔다.


건물은 , 유리, 벽돌, 콘크리트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건물에서 사용하는 것은 요리처럼 재료 부분이 아니라 나머지 부분 즉 '빈 곳’이다. 오르세의 빈 곳이 기차역에서 우체국, 수용소를 거쳐 미술관으로 진화하였다. 건물을 무엇으로 어떻게 들었는지 콤파스와 줄자로만 재려 들지 말고 '건물에도 운명이 있다'라는 생각으로 제 을 찾아줘야 하는 건 아닐까. 마치 인간의 사주팔자를 보듯 말이다. 껍데기보다 그곳에 깃드는 영혼을 나는 언제나 생각하고 싶었다.  


2층 난간에서 한동안 전시관을 내려다 보았다. 오르세의 커다란 벽시계가 치 달리의 시계처럼 휘청거리더니  팔을  덜나를 붙잡다. 그리고 물었다.


오르세는 결국 빈 곳을 채워 미술관이란 역할을 찾았는데    떻게 채울 냐며.   무엇인지 알기나 하냐.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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