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사람들은 기차역이 변신하여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오르세(Musee d'Orsay)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오르세는 한복판의 높고 긴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작품들이 걸려 있다. 이 통로는 과거에 철로가 있던 자리다. 여기에 마치 미술사의 새로운 출발역인 양 미술관이 들어앉았다.
기차역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1층 공간. 건너편 가운데 걸린 커다란 벽시계는 기차역 시절에도 걸려 있었다.
나는 오르세를 볼 때마다 어떻게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바꿀 생각을 했을까. 건물에도 풍수와 도참(圖讖)에 따라 운명이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인상파 화가도 만날 겸 궁금증을 풀 실마리도 얻을 겸 오르세를 찾았다. 마침 파리에 한 주나 머물게 되어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겼던 터였다.
파리를 흐르는 센 강. '왕의 다리'라 불리는 퐁 루아얄(Pont Royal)을 사이에 두고 강 한쪽은 오르세, 다른 한쪽은 루브르가 자리 잡았다. 둘 다 최고의 미술관이다. 나는 며칠째 오르세를 들락거렸다. 루브르보다 오르세가 더 땡겼다. 오르세에는 마네, 모네, 세잔, 르누아르, 드가, 고흐, 고갱, 로트렉까지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이 마치 생맥줏집 흔한 달력처럼 걸려 있다. 이곳은 도대체 지루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이렇게 미술에 조예가 깊었나 싶을 정도로 눈에 익은 그림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센강 건너편에서 본 오르세 미술관. 강 옆이라 그런지 유람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르세는 원래 기차역이었다. 프랑스는 1900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박람회장까지 사람을 실어나를 방법을 고민하였다. 4월부터 11월까지 열릴 박람회장을 찾을 것으로 예상되는 관람객은 무려 5천만 명. 정부는 파리 외곽에서부터 박람회장까지 철도를 깔고 마침 화재로 버려진 재판소 부지에 기차역을 짓기로 했다. 오르세였다.
19세기 유명 건축가 빅토르 랄루(Victor Laloux)가 나섰다. 랄루는 역사 정면을 모두 석조로 만들었다. 내부에는 에펠탑보다 많은 철근 12톤을 넣고, 유리를 3만5천㎡나 붙여햇빛을 최대한 끌어들였다. 천장은 로마시대성당을본떠둥글게 덮었다. 또전기로 움직이는 승강기를 화물용과 여객용으로 따로 놓아 유럽 최초의 전기구동식역으로 만들었다. 역사 남쪽엔 방이 370개나 되는 루이14세 양식호텔을지어 누구든지 머무를 수 있게 하였다.
오르세가 기차역으로 지어질 때(왼쪽). 기차가 드나드는 플랫폼(오른쪽). 오르세 역은 일방통행식이었다. 승객을 태우고 뒷걸음질로 나가 교외의 본선에 합류해서야 앞으로 달렸다
오르세 역은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1900년 7월에 열었던 문을 1939년에 닫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1939-1945)으로 기차 운행이 멈춰 어쩔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났어도 역을 다시 열지 못했다. 역이 작아졌기 때문이었다. 증기로 움직이던 기관차는 객차 열 량을 끄는 게 전부였다. 그 사이 기관차가 힘센 디젤 동력으로 바뀌었다. 객차를 더 붙여 기차가 길어지자 오르세 역의 짧은 플랫폼이 볼품 사나워져 버렸다. 증축이 불가능한 역은 쓸모가 줄어들었다. 오르세는 천천히 버려졌다.
1970년 정부가 '문화유산 보존'을 고민할 때오르세가 눈에 밟혔다.1986년 미테랑 대통령이 개관 테이프를 끊으며 오르세는 미술관이란새 이름표를 달았다. 나는 여전히의아했다. 기차역이 하고 많은 것중하필 미술관으로 변했을까라고.
역(驛)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전부터 존재하였다. 역은 말이나 마차를 타는 곳, 먼 길을 달려온 말과 마차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곳, 또 여행자가 쉬며 기력을 회복하는 곳이었다. 파발(擺撥)이라 하여 통신을 전달하는 수단으로도 쓰였다. 조선 시대는 30리마다 역참(驛站)을 설치했다. 그곳에 원(院)을 두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시간과 거리를 가리킬 때 '한 참(站) 걸린다' 는 말은 '다음 역까지 가는 거리다' 라는 뜻이다. '역전(驛傳) 마라톤'은 '다음 역까지 전달하러 달린다'라는 의미다. 즉 역이 하는 기능은 운송, 통신, 휴식에 있다. '운송'을 잃어버린 역이 다음으로 할 일은 '통신' 이나 '휴식'이란 본성에서 찾아야 한다.
제2차 대전 중 우편집중국으로 쓰였던 오르세(왼쪽). 전쟁 후 전쟁포로들의 임시 수용소로 쓰였던 오르세(오른쪽)
2차 대전이 터지자 오르세는 전시 우편을 취급하는 우편집중국으로 쓰였다.역의 두 번째 본성,'통신'이기능한 것이다. 조금 놀랐지만그러려니 했다. 기겁한 것은그다음이었다.전후 오르세는 전쟁포로가 머무는 임시 거처로수용되었다.당장 갈 곳이 마땅찮은 포로들은 이곳에서 기력을 되찾은 뒤 원하는 곳으로 송환되는 절차를 밟았다. 이번엔 역의 세 번째 본성인 '휴식'이 제역할을 한 것이다. 내가 써놓고 내가 신기했다. 오르세 한쪽에전쟁포로의수용소였다는 사실을 적은동판을 보고 두근거리는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이쯤 되니 오르세 기차역이 미술관으로 변신한 것은 당연해 보였다. 일상에 쫓기는 파리 시민에게 예술가의 작품으로 위로하는 역할. '휴식'이란 본성이 요즘 세상에 맞게 그럴듯한 형태로 구현되는 곳이 바로 오르세 미술관이지 싶었다. 나도 내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풀리지 않은 의문하나가아직 남아 있었다. 오르세가 인상파 화가 작품을 주로 소장하게 된 것은또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라는 궁금함이었다.다시 생각에 잠겼다.
1860년대 파리 철도 노선, 외젠 쿠르브앵이 그린 파리 최초의 철도(가운데), 1870년대 파리 철도노선
1841년 튜브에 든 유화물감이 나왔다. 미국 화가 존 랜드가 발명했고, 1850년대부터는 상용화되었다. 일일이 천연재료에서 물감을 추출해 쓰던 시절에는 그림을 바깥에서 그린다는 게 쉽지 않았다.돼지방광에 유화물감을 넣어 들고 나가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튜브 물감이 나타나 화구나 재료를 휴대하기 쉬워지자 화가들은 하나둘씩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순간적인 빛과 대기의 움직임을 포착해야 했던 인상파 화가들에게더할 나위 없었다. 여기에 다리를 놔준 게 철도였다.
1832년 프랑스는산업용단거리 철도를처음으로개통하였다.1850년대초반부터파리를 오가는여객철도를하나 둘 놓기 시작했다. 인상주의가 시작하는1860년 경엔파리를 중심으로하는교외 철도망을대부분완성하였다.인상주의가 끝나는 1905년쯤에는 프랑스 전역을촘촘한 거미줄처럼 연결시켜어디든지 갈 수 있는 철도망을갖췄다.
오르세는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을 인상파 화가 최고의 수작으로 꼽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휴대용 물감과 이젤을챙겨 기차를 탔다.초기 화가들은 파리에서 멀지 않은 북쪽 노르망디 해안을찾았다. 그들은 빛을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세상을 눈에 보이는대로 묘사하고 싶었다. 그들에게 기차역은 인상주의란세계로들어가는출발점이자 마침내 닿을 종착지였다.
파리 근교로 가는 생 라자르(St. Lazare) 역엔 베레모를 쓴 화가들이 단골로 나타났다. 1877년 가을, 모네는 역장을 찾아가 모든 기차를 플랫폼에 세우고 연기와 수증기를 내뿜도록 부탁한 적도 있다. 역장은 한술 더 떠 승객의 출입을막았다. 모네의 <생 라자르 역 : 기차의 도착>이 탄생한 일화다.
모네는 1876년부터 생 라자르 역을 주제로 하는 10여편의 그림을 그렸다. 1877년 발표한 <생 라자르 역 : 기차의 도착>이다.
모네가 생 라자르 기차역과 그 주변을 그린 연작들.
오르세가 인상주의 작품을 주로 소장한이유가 보였다. 생전의 그들이 빛과 자연을 그리기 위해 기차를필사적으로 이용했던 만큼 그들이 남긴 작품도기차역, 오르세를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창문을 많이 달아 햇볕을 풍부하게 모은 것도 빛과는 뗄레야 뗄 수없는 인상주의 특징과 아귀가 잘 맞았다.
이렇게 설명하는 도슨트(Docent)는 단한 사람도 없지만인상주의와 기차역의 찰떡궁합이 오르세만큼 맞아 떨어지는곳도 드물었다.
며칠간의 오르세 탐방을 마쳤다. 오르세에 관한 생각을 거듭하다가 지난가을 포르투갈 여행이 떠올랐다. 맞다. 그곳에도 기차역이 미술관으로 진화하는산증거가있다.
포르투갈 포르투(Porto)에 있는 상벤투(São Bento)역이다. 이곳은 2만여 개 타일로 포르투갈 역사를 묘사한 아줄레주(azulejo) 벽화가 유명하다. 상벤투역은 이미 정체성의 반 이상이미술관으로넘어왔다. 이곳을 찾는 사람 대부분은 기차를 타기보다 건물과 벽화를 감상하러 오기 때문이다. 독일에도 비슷한 증거가 있다.1996년 개관한 베를린의 함부르크 반호프(Hamburger Bahnhof) 미술관은기차역이 미술관으로 진화한 최근 사례다.
베를린의 함부르크반호프 미술관, 포르투의 상벤투 역(가운데), 파리의 La Recyckerie는 기차역을 개조한 레스토랑이다. 역의 본성 중 '휴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Louis Sullivan)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오랜 화두를 남겼다. 기능에 맞게 건물 형태를 건축해야 한다고 풀이하지만 오르세를 본 나는 이 말이다르게다가왔다.
건물은 철, 유리, 벽돌, 콘크리트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건물에서 사용하는 것은 요리처럼 재료부분이 아니라 나머지 부분 즉 '빈곳’이다. 오르세의 빈 곳이 기차역에서 우체국,포로 수용소를 거쳐 미술관으로 진화하였다. 건물을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콤파스와 줄자로만 재려 들지 말고 '건물에도 운명이 있다'라는 생각으로 제 역할을 찾아줘야 하는 건 아닐까. 마치 인간의 사주팔자를 보듯 말이다. 껍데기보다 그곳에 깃드는 영혼을 나는 언제나 생각하고 싶었다.
2층 난간에서 한참 동안 전시관을 내려다보았다. 오르세의 커다란 벽시계가 마치 달리의 시계처럼 휘청거리더니 두 팔을뻗어 덜컥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오르세는 결국 빈 곳을 채워 미술관이란 역할을 찾았는데너는빈곳을어떻게 채울것이냐며.네역할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