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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Jun 13. 2018

백미러가 해준 말

체코




"다음 안내까지 직진입니다"   


시야가 트이자 불쑥 구글 내비가 끼어 들었다. 이번 프라하 공항에서 스코다(SKODA)를 빌렸다. 스코다는 1895년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회사다. 체코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유리를 세공하며 손 재간을 익혔다. 그 재주로 기계를 만지며 장인처럼 손 끝을 벼렸다. 체코에는 문을 연지 300년이 넘는 프라하공대를 비롯 100년이 넘는 공대가 수두룩하다.


2차 대전으로 독일에 점령된 체코는 히틀러의 지시로 전쟁무기를 만들며 솜씨가 더 늘었다. 탱크며 무전기가 그랬다. 웬만한 기관총은 다 체코에서 만들었다.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이 사용한 총도 체코제라 했다. 폭스바겐을 세운 페르디난드 포르셰(Ferdinand Porsche) 박사도 체코사람이었다. 히틀러가 아꼈던 체코의 장인 기술. 그게 궁금해 일부러 체코 자동차, 스코다를 골랐다.    

 

렌터카여행이란 말 대신 '모터 크루징'(motor cruising)이란 말을 생각해 내곤 어찌나 뿌듯하던지.


속도계를 보았다. 달리고 싶어 연신 ‘가르릉’ 대는 스코다. 1.6리터 4기통 자연흡기 엔진치고 힘이 좋았다. 스포츠 모드로 놓고 살짝 가속페달을 밟아보았다. 변속기 맞물림이 덜컥하고 시프트다(shift down) 되면서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게 100마력짜리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묵직했다.


나는 계기판 숫자를 고속도로 제한속도인 시속 110킬로에 맞추고 냉큼 크루즈를 걸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떼버렸다. 이젠 속도가 아닌 풍경을 체감하는 거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유채꽃밭과 나지막한 구릉. 터키 블루로 칠한 보헤미아의 5월 하늘. 흘낏 백미러를 살펴봤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핸들도 놓아버릴까. 그렇게 나는 프라하에서 빈을 거쳐 부다페스트로 이어지는 판노니아 대평원을 전자오락처럼 잡아먹었다.     
   


부다페스트 지하 주차장 진입로. 왼쪽 백미러가 접혀지지 않아 손으로 억지 힘을 쓰다가 그만 거울이 덜컹하고 떨어졌다.


이번은 5월 연휴를 포함해 3주짜리 휴가를 어렵사리 만들었다. 출발하는 날. 혹시 누가 부를까 봐 휴대전화를 끈 채 퇴근 길로 밤 비행기를 탔다. 큰 도시만 해도 프라하, 부다페스트, 자그레브, 류블랴냐, 두브로브니크를 일정에 넣었다.

나라로는 체코, 헝가리, 크로아티아 같은 익숙한 곳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처럼 낯선 국가를 섞었다. 오래전부터 내전이 끝난 동유럽을 자동차로 달려보고 싶었다. 게으른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 이제야 짐을 꾸렸다. 다시 자동차 여행에 발동이 걸렸다.     

그러니까 1995년 영국에 살 때 처음 자동차 여행을 알게 되었다. 그해 여름 에든버러에 도착해 일주일 되던 날. 1500파운드를 주고 인공지능 박사과정 유학생으로부터 중고차를 넘겨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박 집사’라고 불렀다. 어떤 이들‘연찬이 아빠’라고도 했다. 누구라도 좋았다.



영국의 차는 핸들이 오른쪽에 달려 있다. 닛산도 그랬다.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하면 반대차선으로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


교회에서 만난 그는 첫마디로 내게 차가 필요치 않으냐고 물었다. 나는 기꺼이 박 집사의 20년 된 닛산 수니(NISSAN Sunny)를 처분해 줬다. 닛산은 이 차종을 1966년부터 생산했다. 30년이 지난 그때도 여전히 거리를 잘도 굴러다녔다. 덜렁거리는 백미러 한 쪽만 갈아 끼웠는데도 부러울 게 없었다.


가끔 와이퍼 나사가 도망가거나 라디에이터에서 물이 새도 부품이 흔해 고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오른쪽 운전석에 삐딱하게 앉아 왼손으로 수동기어를 툭툭 처넣으며 피프스 브릿지(Fifth Bridge)나 리스웍(Leith Walk)을 지나다녔다. 원래부터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었던 것처럼 금방 영국의 반대방향 통행에 익숙해졌다. 간혹 햇볕이 좋으면 가까운 스털링이나 세인트 앤드류까지 내쳐 달리곤 했다.    



거꾸로 걸을 수는 없을까. 하늘에 발자국을 내고 싶었다. 차를 내려 하늘을 걷는 꿈을 꾸었다.

     
수업이 없는 날엔 '고무 다라이' 색 닛산을 끌고 하일랜드(Highland)로 올라갔다. 박 집사는 꼭 '버건디'라고 불렀는데, 그게 다라이 색을 가리키는 줄은 몰랐다. 회삿돈으로 다니는 학교라서 공부엔 큰 관심이 없었다. 도서관 책상보다 닛산 운전석에 더 자주 앉았다. 백파이프 소리를 따라가다 괜히 애틋해지면 브레이브 하트 흉내를 냈다. 차를 멈추고 길가에 핀 여뀌나 엉겅퀴, 데이지와 무릎 꿇고 앉아 눈을 맞췄다. 겨우 2년 남짓 살면서 나는 스코틀랜드를 고향으로 여겼다. 그렇게 닛산과 고향 친구가 되었다.


뱅크 홀리데이에는 에밀리 브란테와 샬럿 브란테가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를 쓴 하워스(Harworth)로 달려가 들판에 부는 바람을 맞았다. 추위에 헝클어진 머리로 애프터눈 차를 마시고 목사관을 나오면 어김없이 닛산이 나를 기다렸다. 방학이면 학교 아파트를 떠나 뉴캐슬이나 하위치에서 닛산을 싣고 네덜란드나 프랑스를 향해 북해를 건넜다. 차가 오래되었다고 런던 가는 일도 말리던 박 집사는 나의 무모함에 혀를 차다가 나중엔 운전자보험이나 꼭 가입하라는 충고 정도에서 손을 들었다.



스코틀랜드 스카이 섬에선 자동차보다 양들에게 도로사용권이 우선된다.


그 후 뉴욕에서 일할 때는 반쯤 내 세상이었다. 뉴욕에선 링컨(Lincoln) MKS였다. 힘 센 차에 잘 닦인 도로. 똑똑한 GPS. 나는 점점 자동차 여행의 능력자가 되었다. 에든버러를 떠날 때 닛산과는 중고차 시장에서 헤어졌다. 그 돈으로 프린세스거리(Frinceses St) 존 루이스(John Lewis) 백화점에서 아내에게 어울리는 구찌 시계를 샀다. 닛산이 손목시계로 바뀌어 아내에게 사준 가장 비싼 선물이 되었다. 뉴욕에서도 시계를 찬 아내가 동행하였다. 그리고 보면 닛산도 우리와 함께 여행을 계속한 셈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군데를 여행하였다. 그중 이동수단으로 자동차에 견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기차로 하는 배낭여행이나 버스로 하는 패키지여행은 도시에서 다음 도시를 이어주는 기능에선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이는 여행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정을 생략하고 만다.


나도 안다. 여정이라면 걷는 여행이나 자전거 여행이 더 풍성하다는 거. 그렇다고 도보여행이나 자전거여행을 선택하기엔 시간도 체력도 부족했다. 더구나 아내와 함께 움직이려니 어느 정도 편안함도 갖춰야 했다. 무엇보다 자동차가 있으니 '내 맘대로 여정'가능했다. 여행에서 여정을 빼면 내겐 미술책에서 본 깨진 벽돌 조각이나 쇼핑센터에 들르기 위한 부산함 밖에 남지 않는다. 피곤한 다리나 부르튼 입술도 피하자니 자동차 여행이 딱 좋았다. 유럽에선 특히 그랬다.     



미국에서의 자동차여행은 유럽과 또 다르다. 제일 큰 차이는 스케일이다. 유럽이 동네운전이라면 미국은 고속도로랄까?


내게 자동차 여행은 한 마디로 자유며 방랑이다. 마을을 지나쳤다가 돌로 만든 집이 너무 아름다워 되돌아 왔던 오후. 겨울 바닷가를 달리다가 말을 탄 일행과 마주치는 영화 같은 조우. 또는 운무가 짙은 새벽 호숫가에 멈춰선 채 주먹으로 닦아내던 느닷없는 감동의 눈물을 경험하게 된다. 자동차는 질주하는 빗길의 쾌속감 뿐만 아니라 길이 주는 느린 여운을 호흡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괴테가 말했다. 아무 자취도 없는 첫 새벽길에 나서면 신의 존재가 느껴진다고. 그 말에 동의했다.      

 

"부다다다다다- "


요란한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죽옷으로 중무장한 네댓 명 사람들이 모터바이크를 타고 나를 추월했다. 막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Bratislava)를 지났으니 좀 있으면 헝가리 국경이다. 옆으로 다뉴브강이 굽이친다. 백미러를 살폈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인가 볼록 거울에 쓰인 이 말이 내게 다르게 다가왔다.        



유럽의 구시가지에 들어가면 네비는 무용지물이다. 표지판을 읽는 눈과 상황파악에 필요한 눈치, 그리고 운에 기대야 한다.


자동차 백미러는 107년 전 미국에서 처음으로 탄생하였다. 1911년 5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인디 500’이란 자동차경주대회가 열렸다. 대회에 참가하는 자동차는 대부분 정비사가 함께 타는 2인승이었다. 경기 중에 발생하는 고장을 수리하고 뒤따르는 경쟁자들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동네 정비소에서 일하던 레이 하룬(Ray Harron)은 정비사 자리를 없앤 1인승 자동차로 대회에 참가했다. 대신 운전대 큼지막한 거울 하나를 달았다. 하룬은 이 거울을 통해 후방을 확인했다. 좌석 하나를 없앤 자동차는 그만큼 가볍고 빨랐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았던 그는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날부터 사람들은 처음 보는 자동차 거울, 백미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11년 인디500 자동차 경주, 모두 두 사람이 탔는데 32번을 단 레이 하룬은 혼자 타고 있다. 대시보드 위에 중계 카메라처럼 생긴 백미러를 부착하고선.


시상대에 오른 하룬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어떻게 백미러를 만들 생각을 했어요?"
"아침마다 화장대에서 손거울을 들고 뒷머리를 만지는 아내를 보다 떠올렸죠"

나는 이 대답이 좋았다. 아내에게 하룬 얘기를 들려주고 소리내어 함께 웃었다.


자동차여행 중에 백미러는 뒤차를 살피는 일만 하진 않는다. 백미러는 후방 대신 추억도 비춰준다. 아스라이 사라지는 백미러 속 길을 쫓다가 문득 오래된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방금 지나온 길을 닮은 예전 그 길. 에든버러 웨스트 니콜슨(W. Nicolson St)거리로 되돌아갈 순 없을까. 그럴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유턴을 할 텐데.


하지만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본다. 상념은 잠깐일 뿐. 백미러를 보는 건 뒤로 가려는 게 아니 달려가야 할 앞길을 가늠하기 위해서다. 키에르케고르는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뒤를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뒤에 미래가 있어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바르게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나도 지금 백미러를 통해 지난 동선을 확인하며 오늘 저녁 도착할 도시를 예감하는 것이다.    



낯선 외국에서 하는 밤 운전은 쉽지 않다. 가능하면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해야 한다.


내비를 보았다. 실시간 교통량이 빽빽하다. 부다페스트에는 사흘간 머물 아파트를 예약했다. 매니저를 만나 집 열쇠를 받으려면 그녀가 퇴근하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차가 밀리지 말아야 하는데. 신경이 곤두섰다.

다시 백미러를 살폈다.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낯선 공항에서 렌터카를 픽업하면 내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이리저리 어색한 장치를 몸에 맞출 때 긴장은 최고로 높아진다. 이때 백미러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게 이렇게 말해 준다. 사실 그건 나한테만 통하는 엉뚱한 해석이다. 긴장을 풀어주는 마법 같은 주문이기도 하다. 나를 달래주는 말. 그 말이 다시 눈에 어왔다.                 


“거울로 보는 목적지는 실제보다 훨씬 가까이 있습니다.”

 (Objects in the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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