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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효진 Mar 16. 2020

속눈썹이 길었던 아이

나를 더 사랑하기로 하자

미국 어디엔가에서 아들 낳고 잘 살고 있을 내 고등학교 동창 J양은 멋진 아이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카랑한 목소리를 가졌는데,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상식도 풍부해서 함께 있으면 웃을 일이 많았다. 반면 나는 키가 크고 좀 소심하고 체구에 비해 목소리가 너무 가늘었다. 그나마 이 친구와 다녔던 시절엔 함께 팝송도 듣고 수련회에 입고갈 옷쇼핑도 하며 취향이라 할만한 것을 찾는 일을 여럿 해보았던 것 같다.


또 한 친구가 생각이 나는데 그 아이는 글씨를 또박또박 쓰고 말도 글씨처럼 또박또박 예쁘게 하던 아이었다. 만약 나중에 딸을 낳는다면 그 아이처럼 예쁘장하고 성실한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친구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곱슬머리가 나름 불만이었던 것 같지만 나는 그것도 예쁘다고 생각했다. 특히 짙은 쌍꺼풀에 붙인듯이 길었던 속눈썹이 꿈뻑꿈뻑 거리는 것을 보면 일상이 0.8배속이 되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로 신비로웠다. 아마 내가 이성이었다면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을 했겠지.


한번은 첫번째 친구에게 두번째 친구의 짙은 쌍꺼풀이 부럽다는 이야기를 했다. '얼굴도 작고 쌍꺼풀도 짙은데 속눈썹까지 기니까 정말 인형같아.' 그러자 그 친구는 '쌍꺼풀이야 쌍꺼풀 테잎을 붙이거나 쌍꺼풀 수술을 하면 되고 속눈썹은 붙이면 그만이지 뭐'라고 별수롭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두번째 친구가 밉상은 아니었으므로 이 첫번째 친구가 깎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조금 억지같아도 왠지 그날이후 은근한 자신감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체구에 맞지 않게 가느다란 목소리로 합창단원이 되고, 물리선생님 짝사랑을 공표하며 쏟은 공으로 물리 백점맞으며 공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외모야 가꾸기 나름이지 뭐'


정말 그시절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던 것도 시간이 지나니 별것 아닌 것 마냥 평범하게 생각되었다. 두번째 친구의 외모는 지금 생각해도 평균 이상이기는 했지만 첫번째 친구 J의 센스나 자신감을 두고 본다면 오히려 두고두고 떠올릴만한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문득 이 멋진 친구의 자신감을 떠올리며 나는 꽤 과감한 선택을 하거나 갑자기 닥친 일에도 나름 당돌하게 대처하게 되었다. 그순간만큼은 내 자신을 믿었고 근본없는 자신감이 나를 활력넘치게 했다. 스무해 전 그 우수에 찬 예쁜 속눈썹을 바라보는 대신에 나는 내 눈 속에 더 큰 세상을 담을 수 있도록 애쓴 셈이다.


우리아이는 태어나던 날 단 하루 보여주고는 네살이 된 지금까지 도톰한 눈두덩에 쌍꺼풀을 숨기고 살고 있다. 신나게 뛰어 놀다가 엄마품으로 달려드는 그 가슴 터질듯한 미소가 쌍꺼풀따위 없다한들 이토록 예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제 나는 이 아이가 긴 속눈썹을 가지기보다는 자기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자신있게 내세울 줄 아는 J같은 아이로 커줬으면 한다. 조금 새침해도 나는 그런 아이가 참 부럽고 예쁘고 그랬다니까.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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