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울의 움직이는 성, 소피야 안녕
그냥 가끔 찾게 되는 사람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집중적으로 보던 시절이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 전문 서적 중에는 미야자키의 작품 속 인물들, 특히 여성 캐릭터의 계보를 그리면서 그 특성을 묶어 설명하던 책도 있었다. 박사과정 수업에서 읽었던 여성영웅의 여정에 관한 내용과 맞물리면서 관련 내용을 학술대회 발표까지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날카롭고 의미있는 해석을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어쩐지 나는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바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소피라는 캐릭터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하울과 달리, 18세 소녀가 90넘은 할머니가 되었는데도 정신을 바짝차리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과연 나는 그런 상황에서 침착을 발휘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황당하고 치명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어른보다 어른스러울수 있을까. 역시 주인공은 주인공인건가.
순식간에 할머니가 되었다가 점차 어려지는 소피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영화는 그 서사만큼이나 한 사람의 내면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새기게 되었다. 나름 주체적인 캐릭터인 다른 지브리 여자 아이들에 비해 소피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인생에 커다란 시련에도 자신의 일상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삶을 개척하고 바로잡으려 애쓰고 그 선한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존재.
사실 거창하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크다.
왠지 소피에게 가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오늘의 서운했던 이야기를 들어줄 수도 있고 때론 너무 작아서 누구에겐가 말하기 부끄러운 작은 성취를 칭찬받을 수 있는 그런 속깊은 대상이 되어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왠지 요즘들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낀다. 뭔가 붕 떠 있던 것이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먼지는 날아가고 산뜻해진 내가 가뿐하게 내려앉아 찬찬히 무언가를 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상태가 된것이다. 그래서 수첩도 써보고 앞으로 해야 할 것들에 가슴 설게기도 하고 하나씩 구체적인 일과를 클리어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TV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소피를 만났다. 하울과 하늘을 사뿐 걷는 소피의 상기된 표정처럼 오랜만에 나의 지금 일상도 그렇게 상기되고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한 찬찬한 아침을 맞는것은 아닐까 기대해본다.
안녕! 소피
오랜만이야.
비로소 소장 장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