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청사진
아날로그는 치열한 일상이 아닌 느긋한 감성으로 밀려나게 된 것일까.
결심을 종이에 새기고 그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며 짧고 굵거나 얇고 길거나 어쨌든 끝이 정해진 목표를 향해 시간을 쪼개던 순간이 있었다. 소소한 성취는 그 다음 단계로 가는데 자신감을 주기도 하였고, 미뤄진 일정은 어떻게든지 그 다음날이 되서라도 채워보려는 욕심이 들었다.
그래, 나는 수첩형 인간이었다.
그간 수첩을 잊고 핸드폰 메모나 '내게 보내는 카톡'을 쓰곤 했다. 마트에서 필요한 물품을 적어두거나 오늘 내에 해결해야 하는 은행업무나 자동차 기름 넣기 등등의 일과를 빼놓지 않으려고 한번 더 백업을 해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메모들은 기록이라고 하기에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래서 그 계획이라는 것도 내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것들이다.
팬데믹이 일상을 바꾸었다지만, 이상하게 올해는 내게 있어 굴 속에서 잠을 자는 곰의 시기었던 것 같다. 연초 회사생활 꼬인것 부터 시작해서 자잘한 시행착오를 벌이면서 언제 지나간지 모르게 시간이 훌쩍 지나와있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야 안절부절하게 만드는 것 같다.
곰은 마늘이라도 먹고 사람이라도 되었지, 나는 그 속에서 무엇을 한 걸까. 넷플릭스 시리즈 하나에 꽂혀서 정주행 한 것, 아이돌 최애가 생겨서 매일 업데이트되는 떡밥을 찾는 것 그 외 나를 바로 보고 내가 성장하는 것을 멈추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기라도 한 모양새다.
그래서 다시 수첩을 써보려고 한다. 지도선생님이 쓰시던 학교 수첩을 부적처럼 들고 다녔던 시기의 그 간절한 일상으로 돌아가보고 싶다. 매일 라떼를 마시면서 고된 사회생활을 위로하는 순간을 기록하는 과정을 되살려 보고자 한다.
그렇다고 아마추어같이 촘촘하게 일정을 잡고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하고싶어도 못하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고, 수첩인간 시절이던 그때와 달리 나의 미래만큼이나 '우리'의 미래의 소중함이 커진 지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첩에 나의 계획을 적고 그 과정을 고민하고, 하루하루 그 노력을 기록해 나가는 것은 굴속에서 나와서 나의 일상을 바지런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며 일상의 행복을 증명하는 앨범이 되줄 것이다.
책도 읽고, 논문도 쓰고, 돈도 벌고, 운동도 하고, 딸램 한글도 가르쳐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손편지도 쓰고, 좋은 음악을 듣고...
생각이 많아서 일을 못하는 바보, 계획만 하다가 실천을 하지 못하는 바보만큼이나
생각이 없어서 할일이 뭔지 모르고, 계획이 없어서 일을 두번 하는 멍청이도 싫다.
딱 적당히, 하루 십분만 나의 지금을 되돌아보고 반보씩 앞으로 나가는 나를 꿈꿀 수 있는 수첩인간으로 되돌아 가보련다.
비로소 소장 장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