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생각대로 안 되는 일 처리에 툭하면 야근으로 지치고, 그 덕분에 남편과는 좋은 말도 오가지 않는다. 내가 자식은 바르게 키우고 있는 건가... 여느 아이들처럼 잘 자라주고 있는 걸까? 오늘따라 겨우 버티고 있던 마음이 지하 40층까지 푹 꺼져버린다.
“아줌마, "
우중충한 사념에 빠져 어느새 집 앞에 다다랐을 즘, 앳된 목소리의 꼬마아이가 날 불러 세웠다. 정확히 아줌마라는 호칭으로. 나는 40층까지 꺼진 마음속 울화가 도로 솟구쳐 올랐다.
나 김아영. 마흔이 가까워오는 나이에 피부로 느껴지는 세월. 심지어 여섯 살 난 애까지 있으면서 아줌마라는 단어에 불을 지핀다. 모른척하고 지나가자니 저 꼬마 아이가 날 아줌마가 아니면 뭐라 부르겠냐는 헛웃음에 저절로 고개를 돌린다. 최대한 상냥하게 입꼬리까지 올려가며.
“그래~ 무슨 일이니?"
꼬마는 놀이터에서 뒹굴다 온 건지, 꼬질한 얼굴로 내 옷깃을 슬쩍 잡았다.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경찰서에 데려다주세요.”
애를 잃어버렸단 말은 들어봤어도, 엄마를 잃어버렸단 소리는 처음이었다. 몇 년 살지 않은 꼬마 인생에 지금이 최고로 힘들고 두려운 순간일만도 한데, 울기는커녕 꽤나 당당히 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작은 손을 덥석 잡아 인근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 안에는 두 손으로 지팡이를 잡은 맹인 여자가 안절부절못하며 울고 있었다. 꼬마는 엄마를 크게 불러 자신을 알리며 달려갔고, 여자는 아이를 감싸 안아 내가 있을 곳을 향해 이리저리 연거푸 허리를 굽혔다.
꼬마는 내게 그림 한 장을 선물했다. 오늘 낮에 정말 열심히 그린 거라며 두 손 모아 전해주었다. 물감이 마르지도 않은 채 손으로 만졌는지 번짐 투성이의 그림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 위에 덩그러니 놓인 나무 한 그루. 그 나무는 마치 세상에 툭 떨어트려진 내 모습 같았다.
좋아하는 것 없이 그저 점수에 맞춰 대학에 가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잘하는지도 모르는 것에 메여 멍청하게 일하는 것만 같은 현실. 자괴감에 하루하루를 갉아먹으며 가족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이 거지 같은 삶. 이 모든 수식어가 안타깝게도 나라는 사람이다.
그날 밤, 신기하게도 내 꿈에는 꼬마의 그림 속 풍경이 펼쳐졌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초록 물결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기분 좋은 풀 내음이 코 끝에서 심장 깊숙한 곳까지 설레게도 들어왔다. 나는 꿈이란 걸 자각이라도 했는지, 나답지 않게 모든 걸 내려놓고 머리에 꽃을 단 마냥 널뛰었다. 얼마 만의 여유인가, 꼬마의 번짐 투성이 그림은 내게 평안이란 선물이었다.
그렇게 만끽하던 나의 시야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나무 한 그루가 걸렸다. 그림에서 본 것과는 조금 달랐다. 빼곡한 이파리로 넓게 그늘진 아래에 하얗게 센 머리칼의 할머니가 앉아있었다.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드리워져 나만을 보는 할머니.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아, 곁으로 다가가 풀썩 앉아버렸다.
"할머니는 여기서 뭐 하세요?"
"아가씨 보고 있었죠."
"저를요? 악! 저 미친년처럼 뛰어다니는 것도 보셨겠네요."
"예뻐서 봤어요. 너무 싱그럽고 예뻐서."
싱그럽다니, 열 발가락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발가락과는 다르게 눈물은 눈치 없이 차올랐다. 싱그럽다니.. 예쁘다니.. 삶에 치여 나를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나는 너무 초라해요."
"나도 그럴 때가 있었죠.. 뭘 해도 다 바보 같고, 성에 차지 않고 부족하게만 느껴졌어요."
"어떻게 이겨내셨어요?"
"이기긴... 안 그래도 경쟁으로 뒤덮인 세상에 지쳐있는데 나한테 이기고 자시고 할 힘이 어디 있었겠어요."
역시... 그런 건 없는 건가,
"아가씨, 나는 그냥 살아낸 거예요. 하나뿐인 내 삶이잖아요. 내 삶을 묵묵히 살아냈어요. 그러고 나서 보니까 나를 지켜봐 주고, 기다려주던 사람들이 꽤 있더라고요. 나는 너무 늦게 알았어요."
"아... 맞아요. 내 삶이에요. 엉망이더라도 매 순간 나한테 주어진 내 삶.."
"아가씨가 조금이라도 빨리 알아차린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감사해요, 할머니... 아! 제가 존함도 안 여쭤봤네요!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 꼭 기억하고 싶어서요."
"내 이름은.. 김 아영이에요."
어? 나랑 이름이 같으신데..?
할머니는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나를 향해 다정히 웃어주었다. 곧 번뜩이며 정신을 차린 내가 되물어볼 새도 없이 나는 잠에서 깨고 말았다.
아침이 밝았고, 하루는 또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지난밤 꿈은 무엇이었을까, 나무 아래에서 마주친 그 할머니는 언젠가의 나였을까? 잘 모르겠다. 꿈은 꿈이고, 나는 오늘을 바쁘게 살아내야 한다.
하나뿐인 내 삶을 아주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이 흐르는 시간- 초 단편 ‘당신의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