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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스터 Chester Mar 26. 2022

왜 그렇게 쓴겨? 혹시 일부러 그런겨?

한국사회 관찰기: 영어에 대한 숭상

출근길 전철을 기다리다 역에 걸려있는 이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장소와 이름 이외에 "덕업 예찬, 2022 김해원로작가조명展. Admiration for obsession, DEOK-EOP, DEOP-ZILL"이라고 써 있었다. 展이란 한자가 있기에 윤슬미술관에서 하는 전시회라고는 추측이 되지만 어떤 성격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덕업이면 가장 먼저 德業이 떠오르는데 그걸 왜 미술관에서 예찬할까? 혹시 덕업에 다른 뜻이 있는건가? 머리를 굴려가며 포스터를 살펴보다 DEOK-EOP, DEOK-ZILL을 보고 이게 혹시 덕업, 덕질이란 말을 옮겨놓은게 아닌가란 의구심이 들었다. 

일본어 오타쿠가 한국으로 건너와 덕후가 되었다고 들었다. 집에 꼼짝않고 파묻혀 어떤 분야에 몰두해 온 사람을 일본에서는 오타쿠 おたく(お宅)라고 한다고 한다. 집이나 가족을 뜻하는 宅(타쿠)를 한국에서는 덕후라고 부른다지. 위키백과에 따르면 오타쿠는 특정 대상에 집착적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란 의미를 갖고 있고 사회 부적응자나 반감이 담긴 경멸적인 어조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사이트를 찾아보니 덕후란 단어가 덕업, 덕질, 덕업일치 등으로 발전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덕후의 덕에 직업 業을 붙여 덕업, 뭔가를 하고 있다는 질을 붙여 덕질, 그게 직업이 되면 덕업일치라고 한다고.


전시회 내용이 궁금해져서 검색해 보았다.

http://www.gimha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141

서예, 서각, 그림, 설치미술, 영상 분야의 원로작가 9명과 청년작가 7명이 참여하는 기획전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덕업이니 이 전시회에서는 덕후가 직업으로 된 분들을 초청한 듯 한데, 덕후란 개념을 원로작가에게도 적용하고 있는 듯 했다. 오타쿠(덕후)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젊은이를 연상하게 되지 않나?? 아니면 이 전시회는 젊은 작가 7명에게만 집중하고 있는걸까? 포스터에는 원로작가조명전이라고 써 있는데.. 물론 나이든 분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 수는 있지만 원로라는 말은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된 분을 뜻하니 그런 분들에게 덕후란 표현을 쓰는 건 논리적이지 않다고 생각된다. 아니면, 참가자들은 전문가 수준이 아니다라는 말을 돌려서(비꼬아서)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특히나 포스터의 우측 상단에 Admiration for obsession이란 문구가 적혀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Obsession이란 단어에는 부정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단어가 전시회 포스터에 당당하게 실려있기에 혹시나 내가 잘못 알고 있는건가 싶어 네이버 사전으로 재확인해 보았다. 강박상태, 집착, 강박관념, 몰두, 정신이 팔려있음 이라고 나온다. 다른 데에서 찾아보니, 들러붙음, 관념 따위가 들러붙음 이라고도 나온다. Merriam-Webster 영영사전에서는 a persistent disturbing preoccupation with an often unreasonable idea or feeling이라고 하며, 예로, an obsession with profits,  has an obsession with gambling 두 개가 실려 있다. 


감탄하며 바라보다, 존경하다, 칭찬하다는 Admire의 명사형이 Admiration이니, Admiration for obsession은 '집착(강박상태/몰두)에 대한 존경(감탄)'이 되는데... 이게 말이 될까? 그러기에 혹시나 포스터 제작자는 반어법을 쓰고 있는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전문 수준의 작품이 아니라 그저 집착일 뿐이라고 되돌려 말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럴리는 없으리라. 다만, 포스터에 영어를 써 놓아야만 뭔가 있어 보이고 수준 높아 보인다고 생각한건 아닐까? 그러면서 한영사전이나 번역기를 돌려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단어를 조합해 포스터를 만들었다고 유추하는게 더 맞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포스터에는 꼭 영어로 써 놓아야만 하는걸까? 정말로 정말로 외국인을 위해 영어로 써야만 했다면 외국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 놓아야 하지 않을까? Admiration for obsession 보다는 Admiration for the Art Enthusiasts (또는 The Best, Professionalism on Art, Art Mania)라고 하는게 더 어울려 보인다.


덕업, 덕질로 해석했던 DEOK-EOP, DEOK-ZILL이라는 얘들은 무슨 뜻일까? 아무리 봐도 영어 단어는 아니다. Zill은 이슬람권의 남자아이 이름이거나 벨리댄스용 작은 악기를 의미한다고 하니 이 전시회와는 관련이 없고.

덕업, 덕질이라고 읽어야 하는게 맞아 보이지만 왜 이렇게 썼는지 내 상식으로는 알 수 없다. 'ㅓ'를 영어 알파벳으로 표기할 경우 한국에서는 EO라고 쓴다. 내 이름에도 'ㅓ'가 있기에 EO를 적용했지만 어떠한 영어권 사람도 EO를 'ㅓ'로 발음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EO는 '이어' 로 발음한다. 그러기에 영어권 사람에게 DEOK, EOP을 보여주며 읽어보라고 하면 디어크, 이어프라고 발음할 것이다.

결국 DEOK-EOP, DEOK-ZILL이라고 써 놓고 한국 사람들에게 덕업, 덕질이라고 읽어주길 바란 듯 하다. 그런데 왜 이런 희한한 짓(?)을 해야만 했을까? 알파벳으로 표시해 놓아야만 있어보이는 포스터가 되나?


한국인은 자기 언어를 사랑하고 자기 언어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살아오며 느끼기로는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간단한 외국어(주로 영어) 단어가 우리 생활에 매우 흔히 쓰이지만 거기에 상응하는 한국어를 찾아(없으면 새로 만들어) 대중화 시키지 못한다. 예를 들자면, 굿즈와 빌런.


언젠가부터 굿즈라는 말이 들렸다. 신조어인 듯 한데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러다 이게 영어 단어 Goods라는걸 알게 되었다. 상품, 제품이란 말이 있는데 왜 굿즈라고 하지? 상품이라고 하는 것 보다 굿즈라고 하면 더 품질이 좋아지는건가?

요즘 자주 보고 있는 짝짓기 프로그램에 빌런이란 말이 흔히 쓰이고 있었다. 이 또한 들어보지 못한 말이라 무척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영어 단어 Villain이었다. 캐나다에서 딸내미를 키우며 몇 번 들은 적 있던 이 단어가 한국에서 흔히 쓰인다니.. Villain이 사전에는 악당, 악인, 악한 등으로 나온다. 악인, 악당, 나쁜놈 또는 문제아라고 하면 될텐데 그런 말들은 촌스럽고 빌런이라고 하면 멋있어지나 보다. 역할은 그게 그건데.. 


그러면 한국인들은 영어를 다들 잘하기에 Goods나 Villian 같은 영어 단어를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걸까? 유창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아 보이는게 한국이다. 

왠만한 나라에선 영어가 잘 통한다. 후진국인 캄보디아에서도 중산층 정도면 영어에 능숙하지만 OECD 회원국가이며 경제규모로 세계 10위라는 한국에선 국제공용어인 영어에 울렁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정말 많다. 세계화로 먹고 사는 나라인데 참 신기하다.

거리의 무수한 간판에는 이쁜 한국어보다 (주로) 영어 단어를 이용한 곳이 훨씬 많고 알파벳 만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어떨 때는 영어권 나라에 와 있나 착각하게 될 정도이다. 그러니 전시회 포스터에 DEOK-EOP, DEOK-JILL이라고 자신있게 써 놓는 건 그려러니 하며 애교로 봐줘야 할 듯 하다.

영어가 그렇게 존경스럽고, 수준이 높은 언어라면 아예 공용언어의 하나로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럴 때는 자존심을 내세우기도 하고.. 


언어와 문화는 변한다. 그리고 전이된다. 물이 흐르 듯 언어와 문화 또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물은 지형과 높이 차이로 흐르게 되지만 언어와 문화는 관심과 자부심 차이로 흐르는 듯 하다. 그러니 자신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국 언젠가는 흐지부지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한자가 도입된 이후 순수 한국어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것처럼 말이다. 물론 문법과 같은 기본적 틀은 유지하겠지만...


일상 생활에서 영어로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춘다면 영어에 대한 막연한 숭상은 하지 않으리라(줄어드리라) 생각한다. 그 정도 된다면, 영어 문구 삽입은 있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하는 것이고 정확한 말을 찾을 것이다. Admiration for obsession, DEOK-EOP, DEOK-JILL처럼 쓰는 일은 당연히 없을테고. 쪽팔림을 알테니까...


https://www.youtube.com/@allonboard7654/vid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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