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이것 역시 지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연계 워크숍을 들었다. 가장 처음으로 한 활동은 ‘좋을 때, 슬플 때, 분노가 찰 때’ 내 머릿속의 지도를 그려보고 공유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만 해도 기쁘고, 슬프고, 분노가 차는 순간들을 잔뜩 떠올려 보았다. 즐거울 때는 샤워하고 침대에 쏙 들어갈 때, 맛있는 거 먹을 때. 슬플 때는 물려있는 주식이 떨어질 때, 아플 때이다.
-다 써놓고 모여서 공유하는데 글쎄, 내가 얼마나 개인적 욕구에 충실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분노를 느끼는 순간은 압도적으로 ‘뉴스를 볼 때, 참사 이후 무기력감, 사회적 신뢰의 고리가 약해질 때.’가 많았다. 맞다. 개인의 작고 소소한 행복과 슬픔을 넘어선, 언제 내 일이 될지 모르는 사회 이슈에 주파수를 맞추고 공감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이번 비엔날레는 우리 삶을 규정하는 국경, 정체성의 문제를 직시하며 서구 열강의 전쟁에서 땅따먹기처럼 만들어진 지도가 말하는 합리성, 명확성에 반기를 드는 작품들이 모여있다.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봤던 정연두 작가의 <백 년 여행기>가 문득 생각나기도 했다. 디지털뿐 아니라, 직조, 조각, 3D프린팅, 사막 환경에서 건축재료로 사용되는 어도비 점토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디아스포라, 이주, 도시와 국가의 경계에서 자의 혹은 타의로 그곳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작품 속 뭄바이의 상류층 여성 3명은 사치스러운 삶을 즐기면서 살다가 어느 날, 다라비에 대해 알게 된다. 다라비 지역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슬럼가인데, 이 지역을 지원하기 위해 ‘매직 화이트’라는 단백질 캡슐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이름도 무시무시한 ’Magic White- Bleaching Agent Protein Capsule’ 약을 임산부가 먹으면 피부가 하얀 아기가 태어나는 거다.
-인더스 문명을 일궈낸 인도의 드라비다인은 체구가 작고 피부가 검다. 이들은 카스트제도의 수드라, 불가촉천민에 속한다. 그리고 뒤늦게 들어온 아리아인들은 피부가 희고 덩치가 크며,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계급으로 피라미드의 상부를 차지한다. 태어나자마자 계급이 갈리다니.
-이 약품은 인도에 뿌리 깊게 이어져 온 사회 계급과 연관된 인종 문제를 단순히 밝은 피부를 통해 해결하려는 얄팍한 의도를 반영한다. 아주 웃기고도 슬픈 사실은 만일 실제로 제품이 존재한다면, 이 황당한 약이 팔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당신이 다라비에 살고 있는 임신한 여성이라면, 이 약을 먹어서 문제를 해결할 거야?”라고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그렇게 해서 계급을 흔들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를 했다. 마지 조선 후기부터 너도나도 족보를 사고팔면서 계층의 사다리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처럼.
-작품은 패브릭에 목판으로 찍어내어 채색했다.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라인과 장식적인 인도 우드블록이 매력적이다. 시리즈로 이어지는 그림이 종교의 교리를 전달하는 그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점차 세계화가 진행되어가면서 우리 모두 한 번씩 봐야하는 현대판 행실도랄까.
-생각해 보면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힘으로 해결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다는 생각도 든다. 괜히 힘쓰고 목소리 내봤자 내 현 삶이 망가진다는 생각도 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맞다. 지금이 소중해지기 위해서는 불편한 현실을 이야기해야하고 인식을 개선해 가야 한다. 사소한 나비의 날갯짓이 불러오는 효과를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회 제도가 바뀌어봤자 내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몰라서 지금 당장의 내 이익만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비합리적 제도나 규범에 의문을 품고 담론을 형성기가가 얼마나 어렵고도 멋있는 일인지.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