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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널 HQ Dec 11. 2020

다양성은 어떻게?

잘함과 못함은 과정이기에 다양성은 잘함과 못함을 나눌 수 없다.

세상의 많은 일은 잘함과 못함 그 사이에 있다. 상대적 가치 판단이라는 속성이기에 잘함과 못함보다는 그 사이, 잘함과 못함 사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심지어 딱 한 가지 밖에 없는 무엇인가 조차도 그것을 판단하고 생각하는 주체가 둘 이상이라면, 잘함이 될수도, 못함이 될수도 있다. 즉 누군가에겐 잘함이 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못함이 될수도 있다는 의미다.


다양성을 이야기할 때, 잘하는 것들만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물론 이왕이면 잘함이라는 다양성이 많으면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가능하겠지만, 그 잘함이라는 건 결과물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잘함과 못함은 결과물이라기보다 과정으로 봐야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본다는 건, 잘함이 그 보다 잘함이 나타날 가능성을 늘 안고 있기에 잘함이라는 결과가 될수 없다는 것이고, 못함 역시 못하지 않음, 조금 나아짐이라는 과정을 거칠 수 있기에 못함이라는 결과가 될수 없다. 못함이 잘함으로 가는 과정으로 본다면, 못함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다른 의미에서 누군가에겐 잘함이 누군가에겐 못함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기억해야한다. 물론 다수가 잘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상대적으로 잘함으로 인정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다고 소수가 잘함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함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 반대도 역시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말할 때, 다양성을 다수가 잘함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결과적으로 다양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결국 다양성을 이야기할 땐 잘함과 못함, 다수와 소수를 구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 표현되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해 줄 때에만 진정으로 다양성이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요즘 자주 말하고 있는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말할 땐, 다수가 잘함이라고 인정하는 것들의 다양성이 아니라 소수가 잘함이라고 말하는 것들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하고, 심지어 다수가 못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조차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소수가 있어야 다수도 있다. 잘함이 있어야 못함도 있다. 이 모두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라는 점도 기억해야한다. 그래야 다양성이 다양해질 수 있다.


또 어떤 결과물이 타인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자존감, 자랑스러움을 가질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잘함과 못함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권장한다면 다양성은 보다 더 다양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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