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널 HQ Aug 07. 2019

집단은 개인에게 기계화를 원할지도

공식적 업무 외 비공식적 업무에 따른 감정과 결과는 고려사항이 아닐지도

사람은 주변의 영향을 받는다. 감정 역시.

유독 그 감정에 쉽게 동화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한 집단의 전체 분위기는 각 구성원들의 감정과 분위기가 모여 만들어진다. 물론 그 집단의 우두머리 집단의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만, 좋지 않은 분위기, 편하지 않은 분위기일 때, 누군가 먼저 나서서 분위기 전환을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누군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성원들의 동의를 다 얻을 수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패에 대한 부담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 실패에 따른 영향을 오로지 개인의 몫이고.


분위기 조정의 역할을 맡는 누군가는 개인의 성향과 집단 내 위치로 역할이 암묵적으로 맡겨진다. 개인의 성향과 위치가 그런 역할에 적합할 수도 있지만, 성향과 위치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현재는 성향보다는 위치가 우선이라는 것이 암묵적 동의일지도 모른다(개인의 성향은 시시때때로 달라진다는 점에서 집단 내 한 개인이 오로지 그 역할을 계속 맡아야 한다고 보기 어렵다).


암묵적 동의에서 이루어지는 분위기 조정이 아닌, 공식화한 역할은 가능할까? 집단에서 분위기는 공적인 영역이 아니다. 결국 분위기는 집단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그 분위기를 조정하는 역할은 공적일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 분위기 조정에 나섰다가 개인이 혜택을 보기보다 피해를 보게되는 경우가 많다. 조정이 잘 된다고 해도 당연한 것으로 치부될 뿐이다. 실패했을 때 돌아오는 비난은 오로지 그 개인에게 간다. 이게 집단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개인이 집단을 위해 희생해야하는가? 과거 집단은 개인을 보호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집단을 결코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 단지 의무만 요구할 뿐. 


지금 난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중이다. 아니 닫을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 계기는 많겠지만, 연달아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이 떠오른다. 첫번째는 집단 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내가 왜 해야하는지 모르는 일을 내 성향과 맞지 않는 일을 하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위치에서 결국 그 일을 처리했다. 많은 고민과 스트레스를 견디며 처리했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으로 치부되고 만다. 그 이후 연달아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집단 내 개인의 역할에 대한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내 위에 위치한 이들은 그저 감정적 위로를 하려고 할 뿐 근본적 문제에 대해 피해가려고만 한다는 생각이다.


이 이야기를 한다고는 것 자체가 비참하다는 걸 모른다. 결국 집단의 우두머리 집단에게 그 아래 위치 개인은 그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수행하는 기계를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여기에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생활인이기에, 그저 기계가 되려고 한다. 갈등은 현재 내 성향이 집단의 분위기를 조정해야한다는 입장이고, 위치가 그렇다는 점에 있다. 해봤자 피해만 올 것이 뻔한 상황에서

'내가 왜 해야해?' 여기서 생각이 멈춰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또 다른 삶을 시도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