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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계형 개발자 Oct 01. 2019

대기업의 톱니바퀴

회사가 초일류지 내가 초일류인 것은 아니야

처음부터 내 글을 쭉 읽어보신 분들은 아마 나의 전 직장이 삼성전자인 것을 몇몇 문장을 통해 눈치채셨을 것 같다. 나의 전 직장인 삼성전자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만한 벤츠와 BMW, Intel을 제치고 세계 10위권 이내에 브랜드 평판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며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시장을 몇 년간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고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선 아예 적수 조차 없는 곳. 이외에도 TV, 세탁기, 냉장고 등등 못 만드는 게 없는 기업. 초일류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이 나의 첫 직장이었다.

언제 또 세계 10위권 내의 기업에서 일해볼 수 있을까...?

초일류 기업인 만큼 회사에는 초일류급의 인재도 많았다. 아이비리그 대학교의 교수를 하시다가 임원으로 오신 분도 있었고 FAANG(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을 말하는 단어)에서 꽤 높은 직책을 지내다 오신 개발자도 있었으며 그 어렵다던 리눅스 오픈소스 메인테이너도 많았고 유명 학회에 논문을 수십 편 내고 오신 분들도 있었다. 국내 회사에서 이런 쟁쟁한 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였다. 처음에는 이 분들과 같은 회사에 속했다는 것에 근거 없는 자부심(?)도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나도 이 분들과 동등한 수준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일하는 동안 내가 예상한 대로 성장하지 못한 것 같다. 3년이 지난 지금 내가 확실히 예전보다 나아지고 있다고 느낀 것은 불친절한 회사 업무용 시스템을 좀 더 잘 쓰고 있다는 것, 리젝 당하지 않을 정도의 보고자료를 어느 정도 만들게 됐다는 것, 임원들이 좋아할 만한 평가 수치를 실적으로 잘 내고 있다는 점 정도. 모두 내가 속한 조직 내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능력이었고 다른 곳에 간다면 그다지 유용하지 않게 될 것 같은 일이었다. 3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동등 업계에 스카우트될 수 있는 좋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성장하기보다는 '삼성전자 회사의 일'을 잘하는 직원이 되고 있었다. 입사 초기에 내가 비슷해지고 싶었던 인재들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이렇게 변해버린 것에는 내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부인 하진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동안 충분히 기회가 있었음에도 잘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으며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글에선 내 문제에 집중하기보단 비겁하고 구구절절하게 회사 탓을 해보려고 한다.


내가 있던 곳은 주류가 되는 기술을 개발하는 곳이 아니었다. 요리로 비유하자면 깨소금 같은 것을 만들었다고 할까. 어묵볶음을 만들 때를 생각해보면 깨소금이 뿌려진 어묵 볶음이 맛은 조금 더 좋지만 없어도 먹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다. 이와 비슷하게 내가 속한 부서의 기술도 성공적으로 개발하면 회사 경영에 도움은 되지만 아주 극적인 비즈니스 임팩트를 줄 정도는 아니었고 실패하더라도 회사가 어려워지거나 하진 않았다. 실패로 인한 회사 차원에서의 손실은 내가 있던 팀을 유지하는 비용이었는데 규모가 작다 보니 감수할 만한 투자 정도로 여겼다. 그 결과 조직 분위기는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는 식으로 흘러갔다. 윗선에서 노는 것처럼 보이진 않게 매주 그럴싸한 실적 자료를 내면서 어려운 기술적인 난제를 만나면 '상품화 확정되기 전까진 뒤로 미루자'식이었다.

깨소금이 없어도 어묵 복음은 여전히 맛있다

그렇다고 이렇게 운영되던 옛 팀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이 회사는 철저한 성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이 정책의 이면에는 '실패 시 책임을 진다'는 원칙도 포함하고 있었다. 섣불리 '어려운 기술적 난제를 해결해 보이겠소'라고 말하는 것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경제적인 소요 비용을 감당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성공에 대한 보상은 두둑했지만 실패에 대한 책임 역시 막중했다. 그런데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한 반면 실패할 확률은 매우 높다. 이런 환경에선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이 문제를 감히 해결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확한 해결책을 아는 사람이 나오거나 아니면 총대 메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그래서 내가 속해 있던 부서는 어쩔 수 없이 조직의 생리에 따라 움직였다. 과감히 새롭고 생소한 기술에 손을 대는 것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 익숙한 것을 택해 실패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했다. 허둥대는 모습을 보여줬다간 어떤 책임을 묻게 될지 모르는 반면 작지만 매번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이곳에서 오래 살아남는대 이로운 전략이었다.


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몇몇 사람들은 성과를 냈다. 내가 있던 부서는 오픈소스를 다루고 있었고 요구사항에 따라 이 기능을 확장하기도 했고 버그가 있는 경우 수정하기도 해야겠다. 기능 확장과 버그 픽스 패치들을 오픈소스의 진행 방향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이것을 개인 이메일 주소가 담긴 커밋으로 올린다면 아마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전 부서에서는 개인의 성과물을 외부에 오픈하는 것을 금지했다. 회사의 성과물이기 때문인 것이 주요한 이유였던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개발자가 할 수 있는 성장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했다는 것뿐. 개발자의 입장으로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회사와의 계약에 이미 이렇게 하기로 합의되어있는 상태였다.


회사 탓을 한참 하다 보면 생뚱맞게 신입사원 연수 때 들은 NASA 청소부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미국 항공우주국(NASA)을 처음 방문했을 때였다. 로비를 지나다 우연히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는 청소부를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을 하듯,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나게 청소를 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에게 다가가 무엇이 그렇게 흥이 나는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청소부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저는 일개 청소부가 아닙니다. 저는 인간을 달에 보내는 일을 돕고 있는 중입니다."
- 출처: 매일경제, [김인수 기자의 사람이니까 경영이다] 세 청소부 이야기: 잡, 커리어, 소명의 차이점

배치후 허드렛일을 주로 맡게 되는 신입사원들에게 '거대 조직에선 작은 일도 중요하니 허드렛일에서도 의미를 찾으라' 뭐 이런 뜻으로 전달했겠지만 연수 때도 그렇고 지금도 나는 이 이야기를 전달한 목적에 거대한 음모(?)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어쩌면 회사는 처음부터 나를 청소부로 남겨둘 생각이었던 것 아닐까. 물론 청소부를 비하하려는 발언은 아니다. 거대한 우주선을 만드는데 쾌적한 근무 환경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NASA는 청소부에게 청소 그 이상을 요구하진 않았을 것이다. 청소부에게 전문적인 역량이 필요한 우주선 도면을 작성하는 일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청소부의 역할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원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회사에서 내가 원하는 모습도 청소부와 비슷했던 것 아닐까. 사실 회사에는 모든 사람이 초일류가 될 필요는 없었다. 전문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회사에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하지만 또한 회사 내 보고 시스템을 잘 알고 있으며 경영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보고서를 만들 수 있는 사람, 불친절한 업무시스템을 불만 없이 쓸 수 있는 사람, 시키는 일을 군말 없이 할 수 있는 사람도 소위 말해 톱니바퀴가 돼줄 직원도 필요했다. 그래야 회사가 운영될 수 있으며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 있게 될 테니까. 마치 축구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골을 넣는 스트라이커가 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회사 입장에선 지극히 당연한 선택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를 굳이 성장시켜야 하는 의무도 회사는 없다.


3년의 시간의 결과 '회사는 초일류이지만 내가 초일류인 것은 아니다'는 나만 아쉬운 관계가 형성됐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 관계는 더욱 지속될 것 같은 예감이다. 톱니바퀴라고 칭한 업무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회사를 운영하는 업무도 매우 중요한 일 중에 하나다. 이 사람들이 없다면 회사는 절대 굴러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습은 내가 그려왔던 내 미래의 모습과는 달랐다. 나는 일을 통해서 어제는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었지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세계 100대 브랜드 가치 순위: http://www.business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55

NASA 청소부 이야기: 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16/05/380739/ 

커버: http://www.ciokorea.com/news/3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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