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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계형 개발자 Sep 15. 2019

십 년 후가 보이지 않는 곳

존버 할 것인가 탈출할 것인가

나는 전 직장을 공채가 아니라 채용연계형 인턴으로 입사했다. 그래서 다른 신입사원과는 다르게 내겐 몇 달간 회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두 달 정도 인턴으로 일하는 기간은 회사가 나의 업무 능력을 평가하는 기간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회사를 평가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내 성격이 회사의 조직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지, 일이 내 적성에 맞는지, 연봉과 복지가 어떠한지 등등 취준생이라면 궁금해할 만한 정보들을 직접 경험해보고 같이 일했던 선배들에게 물어보면서 회사를 알아갔다.


대부분의 궁금점이 풀렸는데 딱 한 가지 해소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쪽 도메인에서 일하면 내 커리어는 어떻게 될까? 인턴으로 일했던 곳이자 전 직장에서 내가 쭉 일했던 부서였던 곳은 몸담고 있는 개발자가 많지 않고 대중적으로도 알려지지 않는 기술을 개발하는 곳이었다. 전 직장처럼 큰 회사에서도 이 기술을 하는 곳은 우리 팀 말고는 거의 없어 부서장의 표현에 따르면 희소성이 있는 기술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희소성은 여러 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단어다. '물질적 욕구에 비해 재화가 부족한 경우'를 말하는 이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봤을 때 왜 재화가 부족한지 의문이 들었다. 왜 사람들이 이쪽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할까?


채용이 결정되지 않은 인턴 시절에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딴생각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혼자서 '진입장벽이 높고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가설을 세웠다. 컴퓨터 전공자들조차 어려워하는 운영체제와 C언어를 매우 심도 있게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처음 코딩을 배우는 분들에겐 쉽지 않고 전공자들은 기피하는 분야이긴 했다. 그런데 소심하게 세운 가설은 입사 후 인공지능 바람이 불면서 완전히 무력해졌다. 수학 수식이 난무해 쉽게 하기 어렵다고 느낀 인공지능이지만 산업계에 수요와 투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너도 나도 인공지능 대학원, 강의를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수요가 충분하다면 높은 진입장벽쯤은 쉽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


어려워 보여도 돈이 보이는 곳이면 사람들은 찾아간다

그러면 수요의 측면에서는 어떨까? 내가 하고 있는 도메인이 미래에도 사람들이 꾸준히 찾을까? 현재 내가 하고 있는 도메인은 다른 분야의 기술로 대체되고 있는 시점이기도 했기 때문에 수요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추세였었고 이제 막 발을 들인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래서 종종 슬쩍 주변 동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물어봤다. 그때마다 사람마다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그래서 나는 부동산을 하고 있어요" 그중에서 나랑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한 선배의 발언이 기억에 남는다. "그거 생각하면 머리만 아파지더라고요. 저는 그냥 그러려니 해요. 뭐 죽으라는 법은 없겠죠" 나와 비슷하다고 느낀 선배는 문제를 외면하고 현실에 충실했다. 나랑 10살 차이였던 선배의 모습은 어쩌면 내 10년 후의 모습이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음습했다.


오랜 시간 암흑기를 보낸 후 꽃을 피운 인공지능처럼 나도 당장은 미래가 보이지 않더라도 이쪽 도메인에서 10년, 20년을 존버 하는(비속어지만 이것보다 좋은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방법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선택은 장기간 버티기가 필수인 주식 투자나 비트코인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내 성격을 고려해봤을 때 맞지 않는 것 같았고 또 이쪽 도메인은 인공지능처럼 강력한 비즈니스 임팩트가 있는 기술도 아니었다. 십 년간 묵묵히 외길 인생을 걸어가다간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쪽 도메인의 전문가로 인정받게 되는 것보다는 이것밖에 못하는 사람이 될 사람으로 평가받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내가 이룬 성과가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운도 꽤 많이 뒷받침돼야 했다.

장기간 버티기가 필수인 비트코인은 내 성향과 맞지 않는 것 같다

요즘 인기 도서인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야마구치 슈'에서는"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라는 챕터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대다수 내용을 공감하고 좋은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 챕터의 내용은 동의할 수 없었다. 사실 작가의 생각은 만큼 명료한 답도 없다. 내가 사용하는 기술이 주류가 될 수 있도록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확실하게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IT 업계를 흔들어본 사람들(스티브 잡스, 데미스 허수아비 시, 앤디 루빈, 래리 페이지 등등)만 거론해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초일류 조사기관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실시한 예측이 빗나간 사례가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시사하는 바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니 창조해야 한다'가 아니라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일 뿐이다.


그래서 난 불확실한 미래에 베팅하거나 감히 창조하려고 하기보다는 남들이 찾는 기술을 하기로 결심했다. 전 직장의 도메인에 쏟은 시간과 경력이 아쉽기는 하지만 후회는 없다. 3년에 가까운 시간은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고민하고 확인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으니까. 난 미래가 불확실한 분야에서 연구하는 것보다는 수요가 많은 최신 분야에서 부딪혀가며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타입인 것 같다. 새로운 기술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분야라 공부할 것도 많고 일도 많지만 난 불안에 떨며 편하게 일하던 과거보단 십 년 후의 내 모습을 그릴 수 있는 현재가 만족스럽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일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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