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CD 자살률 1위인 대한민국에선 웬만한 자살 사건은 묻힌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잊힌 자살 사건은 사망자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고령층이며, 주변으로부터 도움받기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더 이상 나아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기 쉽지 않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임에도 사람들은 말없이 사건을 받아들인다. 희망이 없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조건에서 벗어난 사건인 경우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반복된 취업 실패로 좌절하며 목숨을 끊은 청년과 견디기 어려운 생활고로 세 모녀가 단칸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충분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이목을 끄는 사건은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의 자살일 것이다. 기업가, 연예인, 재벌 2세처럼 부러움을 받는 사람의 극단적인 선택은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준다. 스포츠카를 몰고 명품 백을 메며 남들이 선망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죽음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대다수가 기대하는 행복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거부하는 행위는 대중의 눈에는 분명히 모순적인 행위다.
그러나 유명인의 모순적인 행위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재벌 2세의 죽음을 통해 어쩌면 보석보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됐다. 대기업 회장의 죽음으로부터 사회적 존경보다 따뜻한 가족의 지지가 추구해야 할 가치임을 느끼게 된다. 이미 교과서를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 인물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활자 너머로 배운 것과는 다르다.
비록 픽션이지만 소설 속 이모의 죽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소설 속 이모는 동나이대 여성 중에서도 가장 부러움을 살만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자식들은 아이비리그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남편은 번듯한 회사의 대표이고 언제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환경을 제공한다. 자식농사도 잘 지었고 경제적으로 걱정할 것도 없는 부러운 중년의 인생. 그런데 이모는 삶의 단조로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유유자적한 인생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분명 모순적인 사건이다.
이모의 죽음은 ‘인간은 고통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인간에게 고통이 필요하다니, 역설적으로 들린다. 가능한 고통을 피하고 스트레스를 덜 받는 선택을 하는 것이 우리에겐 당연하기 때문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제 발로 고통 속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
그러나 고통이 스쳐간 흉터 위에 올라오는 새 살은 삶에 큰 만족감을 준다. 고난의 시기를 보낸 사람들은 결과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내면에 어떠한 묵직한 것이 남는다. 이것은 노력 끝에 무언가를 이뤄냈다는 성취감일 수도 있고 무너지지 않고 견뎌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데서 오는 성장의 즐거움일 수도 있다. 묵직함은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비싼 명품을 살 때와는 다른 쾌감을 준다. 삶이 예전보다 더 두꺼워졌다는 느낌이다.
스스로 삶에 변화를 일으켜 자신의 가치를 증대시킬 때 삶은 두꺼워질 수 있다. 돈과 명예가 있어도 묵직함은 스스로가 쟁취해내야 한다. 스포츠카나 명품백을 구매하는 행위는 남들의 부러움을 살 수는 있겠지만 삶을 두껍게 만들어줄 수는 없다.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업에 성공한다고 해도 사기와 편법을 동원했다면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 외적 성장은 달성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가치가 증대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묵직함 만큼은 모두가 공평하게 느낄수 있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일하지 않고 평생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이 삶의 완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삶의 완성은 어쩌면 허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 자유를 이룬 사람들의 삶은 누구보다 역동적이다. 평생 먹고살아도 충분한 돈을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5성급 호텔에 수영장에서 여유를 즐기는 것보다 좁은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인생을 선택한다.
물론 나는 경제적 자유를 이룬 상태가 아니기에 그들의 심정이 어떤지는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를 성취하는 행위만이 삶을 더 두껍게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있는 고통을 선택하는 것 같다. 삶의 양감만큼은 명품과 고급 호텔 조식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이니까
박재범은 숫자를 넘어선 목적을 찾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박재범이 말하는 목적이 어쩌면 소설 모순에서 말하고 삶의 양감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의 삶은 지금 무엇을 쫓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쫓는 것이 맞는 걸까? 묵직한 질문을 던져주는 소설, 모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