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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 Nov 23. 2022

직업인과 로망에 관한 생각(하)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직업인과 로망에 관한 생각에 이어.


아마 내 세대가 ‘삼국지를 좋아하는’ 거의 끝물이지 않을까 싶다.

비슷한 이야기를 찾으려면 수도 없이 많을 듯한데, 그중에서도 삼국지가 오랜 세월 사랑을 받은 이유는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조차 없는 로망을 간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나 생각이 든다.


나는 꽤 많은 이직 제안을 받고 있다. 보통은 이직 제안 접수 즉시 거절하지만, 한 메시지 만은 무심히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정성스레 쓰여서 왔다.

'팀 빌딩을 위해 기획 파트 리드를 찾고 있고, 기업가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내가 꼭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맥락의 메시지였다. 내 이력을 꽤 자세히 살펴보신 듯했고, 심지어 나에 대해 좀 찾아본 듯했다.


인터뷰 과정도 꽤 만족스러웠다. 나를 평가하는 임원들만 자리했다면 별다른 인상은 없었을 것 같지만, 함께하는 팀원들이 자리한 것이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팀원들이 자신들의 리드로 올 수도 있는 나의 실력을 한껏 의심하는 눈초리가 마음에 쏙 들었다(말미에는 눈초리가 확신으로 변하기는 했다.). 그 안에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보이는 듯하여 설레였다.


그럼에도 현 직장의 친한 직원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들을 배신할 순 없지, 하는 나이브한 생각에) 이직 생각을 반쯤 접었었고, 예의상 이직을 요청한 기업의 대표님을 만났다.


상장 경험이 있는 대표님은 생각 이상의 이력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고, 기업은 순이익율 40%를 넘을 정도로 탄탄했으며, 인사와 업에 관한 생각도 굉장히 많이 일치했다.

대표님의 생각도 나와 비슷했는지, 나를 ’머릿속에 각인이 되는 사람이다'라고 평하셨다는 이야기를 그 기업 인사담당자로부터 전해 들었다.


본격적으로 고민이 들었다.

고민하고 싶지 않았기에, 제발 별로이기를 혹은 그들이 나를 별로라고 생각해주기를 이라는 아주 오만한 마음을 품고 갔으나 팀원들은 훌륭했고, 대표님은 배울게 많았으며, 기업은 탄탄했다. Market Value에 동의할 수는 없었으나 비전이 마음에 들었다.


마침 지금의 회사에서 꽤 많이 고민을 하고 있던 차였다. ‘내가 더 배울 수 있는 환경인가?’가 고민스러웠고,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인가?’가 걱정되었다.

그도 그럴게 나는 서비스 기획, 마케팅, 운영과 사업개발, 정부사업관리까지 관여하고 있었다(참고로 난 기획팀장이다.).

의도치 않게 파이프라인의 중심이 되어 50명의 업무병목이 되어버리니, 뭐하나 집중하기 어려웠다.


퇴사할 요량으로 나의 은사님이자 보스인 CPO님께 면담을 요청드렸다.
‘남아 달라’ 혹은 ‘남지 않아도 괜찮다’ 라는 말씀을 하신다면 퇴사할 생각이었다.

남아 달라는 것은 이 회사에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팀원이 없다는 증거이리라 생각했고, 남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은 내가 해온 일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CPO 님은 제3의 답변을 하셨다.

결과적으론 넘기려 했던 공을 돌려받은 꼴이 되었다.


“그 회사가 혹시 OOOO를 메인 비즈니스 모델로 하니?” 
“그건 아닙니다. OOOO를 메인으로 합니다.”


“그래, 다행이다. 만약 그랬다면, 거기 만큼은 말렸을 것 같아. 서비스 기획자가 들러리가 될 가능성이 크거든. 거기는 너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니?”
“스스로 실링이 있는 회사라고 말하는 회사는 없으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 이상으로 위가 열려있기는 한 듯합니다.”


“그래, 너가 좋은 대학을 나오진 않았으니, 너가 가진 실력 그대로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너가 창업을 해서 성공시키거나, 최대한 빠르게 임원이 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해. 그래도 다른 회사에서 우리 회사 팀원을 좋게 보았다니 기분이 좋다.”

“서로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걱정스럽습니다. 이 안에서 고이는 듯해서요. “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여기 임원들이 너를 고이게 두지는 않아. 그리고, 너는 이제 임원들이랑 경쟁해야해. 너, 이제는 어디를 가던 중심이 될 수 있는 곳을 찾아야해. 너는 여기서는 이너써클 안에 들어와있고, 모든 임원들이 너를 주시하고 있거든. 너도 사람을 뽑아봤으니 알다시피, 이번에 이직하면 꼭 오래 있을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해. 그리고 그 안에서 무조건 이너써클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해. “


면담은 두 시간여 진행됐다.

내가 나간다면 많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어떻게든 해볼테니, 걱정하지 말고 스스로를 위한 방향으로 결정하라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듯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가 이들을 인간적으로 걱정하는 만큼 이들도 나를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CPO 님은 나에게 나가도 될 명분과 나가지 않아도 될 이유를 동시에 주셨다.


다음날 깔끔히 이직을 포기했다.

송구하게도 상대 회사가 내게 꽤 많은 공을 들였던 터라, 본의 아니게 비현금적 손실을 입혔으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간의 정성에 최대한 보답하는 마음으로 왜 이런 결정을 하였는지 가능한 한 진솔하게 답변을 드렸다.


요즘 시황과 우리 회사의 사정을 생각해본다면, 굉장히 멍청한 결정이다.

“나 없으면 회사 안돌아가” 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오만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안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 상황에서 우리 회사에 공백이 생긴다면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꼭 필요한 시간에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확정적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비합리적이지만, 인간적인 말 한마디로 인해

역설적으로 지금의 어려운 시황이 족쇄가 되어 꼼짝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역시 돈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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