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넘기
요 몇 달 나의 업무 형태를 보면, 저 OO는 대체 뭐하고 앉아있지.라고 생각하는 팀원이 많겠지만, 책임감은 내가 가장 신봉하는 (업무에서의) 가치관이다. 요즘엔 오히려 책임감을 뜯어내는 연습을 나름대로 하고 있다. 워낙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여기저기 침을 바르고 다니는데, 이 의사결정 혹은 이 사람의 행동에 내 의견이 쥐똥만큼이라도 반영되었다고 착각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신경 쓰이는 손거스러미를 발견한 것 마냥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사업을 정리한 후, 0년 차 신입으로 지원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창업자 출신인지라, 어차피 돈도 아쉬울 게 없었고(이미 많이 벌어서가 아니다. 여태 많이 벌어본 적이 없어서다), 스스로의 위치를 강제로 제한하고 나면 정말 맘 편하게 회사를 다니며 음흉하게 후일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았고,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멍청한 계획은 첫 채용 프로세스에서부터 실패했다. 회사는 마침 경력직 경영 전략 매니저도 채용하고 있었고, 공인 잡캐였던 나는 그 업무 또한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포지션으로 이주당했다. 물론 한편으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나의 포지션을 찾고, 그 안에서 나름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나는 그때까지 시험 삼아서라도 이력서를 써본 적도 없었고, 모의 면접도 본 적 없었다.
본디 경영 전략 매니저는 '이걸 내가 왜' 싶은 일을 하는 직군이다. 여기저기 참견하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 적절한 직군이었다. 입사 첫날부터 첫 한 달간, 계약 관리 시스템 구축 업무부터 마케팅팀의 KPI 및 프로세스 수립, 주요 광고 캠페인 운영 전략 수립, 성장 전략 및 재무 전략 수립, 서비스 상위 정책 수립과 계약서 및 서비스 이용 약관 작성까지, 수십 개의 업무를 진행했다. 그 와중에 트래킹 툴을 도입하고자 싸웠고, 운영팀의 운영 업무 지원과 백오피스 기획까지 진행했었다. 그렇게 경영 전략 매니저에서부터 그로스 팀장을 거쳐, 서비스 기획 팀장과 서클 치프가 되기 까지, 수백 개의 일에 침을 발랐고, 수십 명의 사람에 참견했다.
참견하는 일이 많아지면, 내 일에 책임감이 생기고, 참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 사람에 책임감이 생긴다. 사람의 개인사와 생각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면, 그 사람을 미련 없이 밀어내기가 참 어려워진다. 충분히 배우고 또 인지하고 있지만 잘 실천하지 못하는, 팀 리더로써 크나큰 단점이다.
나는 누군가를 밀어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차라리 같이 뛰어내리는 것을 선호한다. 누군갈 밀어내야 하는 상황은 크게 보아 결국 내 탓이다. '비가 너무 적게 와도,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았다.' 했던 세종대왕과 노무현 대통령만큼의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다.라고 기억되고 싶다.
요즘엔 많은 것이 참 녹록지 않다. 또다시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