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할 때, 자기 전, 걷거나, 운전할 때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오른다. 창업자나 프로덕트 매니저는 불현듯 떠오른 제품에 자꾸만 살을 붙여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상상이 구체화될수록 내가 뭔가 엄청난 것을 생각해냈다는 착각이 든다. 이때부터는 이 ‘세계 최초의 대단한 아이디어’를 꽁꽁 숨기기 바빠진다. 내가 만들 것에 대해 넌지시 암시만을 주며 사람들의 의견을 묻고, 사람들은 보통 좋은 피드백을 주며, 다시 아이디어를 꽁꽁 감추고 좋은 피드백을 기대하는, 일종의 네거티브 피드백 루프가 만들어진다.
일단 시장에 나가면 기대는 박살이 난다. 시중에는 이미 그와 비슷한 제품이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가지가 출시되고, 사람들은 내 제품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좋다 싫다도 없다. 안 듣는다), 아무리 열심히 알리고 홍보해봐야 힘만 빠지고 돈만 쓴다.
너무나도 많이 봐왔던 아주 흔한 케이스다. 위의 네거티브 피드백 루프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내 아이디어를 꽁꽁 숨기는 것 - 아이디어 자체가 어떤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제품 중에 처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루폰, 배달의 민족, 페이스북, 토스와 직방 등)
2. 사람들이 긍정적인 피드백을 남기는 이유 - 사람들은 원래 긍정적인 피드백을 한다(척지고 살 필요는 없으니까). 또한 창업자 / 프로덕트 매니저가 피드백을 요구할 때(이거 살 것 같아? / 이거 좋은 것 같아?)는 이미 편향이 생긴 상태이기 때문에 묘하게 좋은 방향으로 유도신문을 한다. 설령 부정적인 피드백을 남겼다고 해도, 그 안에 티끌 같은 좋은 점을 확대해석하거나 무시한다.
위 루프가 3번만 돌면 세상을 뒤집어버릴 제품을 생각해냈다는 착각이 든다.
막상 시장에 나가면 사람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필요 없다 - 가장 많은 케이스다. 애초에 문제가 아니었거나, 해결할 정도로 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해결을 원하는 문제는 일종의 시그널이 있다.
2. 나를 위한 제품이 아니다 - 타겟이 아니거나 모든 사람을 타겟하고 있기 때문이다. 2살 아기를 위한 무알콜 맥주는 필요가 없다. 0세부터 90세까지를 타겟하는 유혈이 낭자하고, 교훈적이며, 감동적이고, 판소리와 K-pop이 가미된 나훈아 주연의 뽀로로 버전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는 누구도 보지 않는다.
종합하자면, 우리는 아직 이 문제가 실존하는지 모르고, 해결할 가치가 있는지 모르며, 정확히 누가 겪고 있는지 모른다. 아직 제품을 생각할 때가 아니며, 우리가 해결하려는 문제를 확인하고 적합한 타겟을 찾아야 할 때다.
개인적으로는 아래 형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며 정성적으로 문제를 확인했다. 정성적인 질문들은 우리에게 인사이트를 준다. '문제가 실존하는 지를 확인한다 / 문제가 얼마나 크리티컬 한 지를 확인한다' 두 가지 원칙만 지키면 문항을 바꿔도 별 상관없지 않나 싶다.
나는 먼저 수립해놓은 고객 가설에 기반하여 인구통계적 정보를 정리하고, 주변 사람들부터 인터뷰하기 시작하여, 그와 유사한 사람들을 만났다. 30분 정도 시간을 내달라고 요청하면 보통 거절하지 않으며, unmet needs를 확인하기 위해 물음표 살인마로 변신하는 게 좋다.
기본 사항 인터뷰 대상자의 인구통계적 정보를 수집한다. 어떤 일을 하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그리고 아래 문제들과 연결된 기본적인 내용들을 확인하면 된다. 물론, 인구통계정보에 따라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다를 수 있다. 고객 세그먼트에 따라 Unique Value Proposition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문제에 관한 질문 문제는 최대 3가지 정도만 확인하는 것이 좋다. 너무 많은 문제는 동시에 해결할 수도 없거니와, 누구도 원하지 않는 제품을 만들게 한다.
각각의 문제에 맞춰 다음 사항을 확인한다.
'중요도 순위' - 이 문제가 다른 문제 대비 얼마만큼의 중요도를 가지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순위는 제각각일 수 있으나, 정성적으로 실제 이 순위가 맞는지 확인해야 하고, 유사한 고객에게서 유사한 순위가 나오는지 확인한다.
'불편한 정도' - 이 문제의 '크리티컬 한 정도'를 확인한다. 불편한 정도를 몇 점 척도로 알려달라고 묻는 게 아니라, 이 문제가 당신에게 얼마나 불편한 상황을 가지고 오는지 정도를 확인하면 된다. 진심으로 짜증 내면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구체적으로 불편한 이유를 자신의 인구통계적 특성을 기반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현재의 문제 해결 방법' -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만약 해결 방법이 없다면,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 해결하고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람들이 해결을 원하는 문제'의 시그널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하는 제품' - 경쟁사 파악을 위함이다. 경쟁사가 전혀 없다면 시장도 없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기타 다른 문제 내가 고객의 삶을 살아본 바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문제를 알고 있을 수 있다. 다른 문제가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끝으로, 자신과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한다. 문제가 충분히 확인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반복한다.
인터뷰에 노이즈가 끼지 않고, 충분히 학습할 수 있도록 아래 사항들을 유의하는 게 좋다고 본다.
1. 리서치 업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 경험상 리서치 업체는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정보를 제공하는 회사지,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회사는 아니다(굿하는 것과 비슷할수도..). 무엇보다, 창업자와 프로덕트 매니저의 학습기회가 사라진다.
2. 대면 인터뷰를 지향한다 - 사람은 자기 마음을 있는 그래도 얘기하지 않는다. 진짜로 좋은지 나쁜지는 그 사람의 비언어적 표현으로 감지할 수 있다. 비언어적 표현을 감지하기 위해서라도 대면해야 한다.
3. 1:1로, 중립적인 장소에서 대화한다 - 사람은 편향된다. 특히, 목소리가 큰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그 의견으로 몰리기 마련이다. 1:1로, 중립적인 장소에서 대화하는 게 상대방이 진짜 의견을 내는데 도움이 된다.
4. 문제만 확인한다. 솔루션을 확인하지 않는다 - 그냥 내 솔루션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게 속편하다. 내 솔루션을 머릿속에 그려가며 대화하기 시작하면, 결과를 정해놓고 인터뷰하는 것과 같다.
5. 유저의 기능 명세를 너무 귀담아듣지 않는다 - 그냥 틀린 내 솔루션과 마찬가지로, 유저도 자기 스스로 뭘 원하는지 모른다. 차라리 유저가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확인하는 게 더 좋다. 헨리포드의 명언을 기억하자. 사람들에게 이동 수단에 대해 질문한다면 더 빠른 말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크리티컬함이 명백한 문제조차도 일일이 확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크리티컬 한 지 긴가민가한 문제를 다루는 순간조차도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어떤 문제를 풀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는다. 나조차도 그렇다. 보통은 게으름이 1순위 원인이다. 나가서 사람 만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귀찮고 무섭다.
올 한 해는 보다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 있기를, 알면서 안 하는 게 제일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