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는 판단 때문이야

중립기어의 기술

by 최은규

우리네 인생이 왜 이렇게 피곤한 것인가 골똘히 관찰을 해보니, 나는 비로소 한 가지 이상한 패턴을 눈치채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에 불필요한 가치판단을 너무나 많이 한다는 사실이다.


무언가가 좋네 나쁘네 판단하는 것은 본능의 영역이고,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사고방식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괴롭다는 것은 중용을 벗어났다는 신호다. 모든 본능이 그저 허용되면 안 되는 것처럼, 가치판단이라는 본능도 얌전히 개목줄을 차고 이성의 손에 들려있어야 한다.



평가 강박증 내려놓기

가장 먼저 신경을 꺼야 할 곳은 '애초에 판단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대표적인 게 바로 누군가의 '인생'을 평가하는 것이다. 절대다수의 인생은 좋음과 나쁨을 판단할 수 없다. 왜 누가 채점해 줄 수도 없는 답안지를 구구절절 작성하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가? 나의 인생, 남의 인생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일련의 사건과 결과 또한 가치판단이 부질없을 때가 많다. 인생은 새옹지마와 호사다마라는 두 야생마가 제멋대로 끌고 가는 쌍두마차다. 기쁜 일조차도 과도한 의미부여는 훗날 나쁜 결과로 돌아왔을 때 실망과 상처만 키운다. 나쁜 일이 끝내 좋은 결과로 돌아왔다면 한동안 괴로워했던 시간이 얼마나 아깝겠는가? 덧없는 가치판단에 쏟을 정성을 해학과 정신승리에 쓰는 게 훨씬 정신건강에 이롭다.



어차피 틀린다. 심지어 괴롭다.

대부분의 가치판단은 십중팔구 인지적, 통계적 편향 위에 내려지며, 그마저도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수 백가지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어지간하면 다 틀린다는 이야기다. 에고에 잡아먹혀 남의 인생을 깎아내리거나, 뉴스의 부정 편향에 속아 염세주의가 되거나, 인터넷의 자극 편향에 물들어 특정 집단을 혐오하거나, SNS에 속아 삶을 비관하거나, 본인의 운을 끊임없이 판단하며 후회에 시달리는 일 모두 편향에 속은 것이다.


또한 가치판단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아전인수식으로 흐를 확률이 높다. 이런 식의 가치판단은 기대를 부풀리고, 실망은 곧 피해의식으로 쌓인다. 내가 회사에 큰 이윤을 안겨줬는데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해보자. 보상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면 보상을 요구하고 쟁취하면 된다. 투쟁을 할 용기가 없다면 가치판단을 중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에고는 스스로의 능력을 과장하고, 끝내는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할 것이다. 이는 만약 내가 회사에 큰 손해를 안겼더라도 그것을 사비로 물어내야 할 일은 없었으며, 내가 아니라도 누구든 같은 위치에서 비슷한 결과를 냈을 것이라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은 판단이다. 가치판단이 날뛰도록 방치한 죄로 그냥 멀쩡한 회사원인 내가 한순간에 사기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스트레스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된다. 긁어 부스럼이 따로 없다.



중립기어 넣기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쟁취해야 한다. 옳은 것은 추구하고, 불의에는 항거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것에는 분명 가치판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취할 행동의 선을 분명히 긋고, 그 선까지 행동을 취했음에도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가치판단을 중단하는 게 좋다.


꼭 필요한 안전거리를 두었는데 어떤 차가 끼어들었는가? 쓸데 없이 욕하고 짜증내면 내 기분만 상한다. 괜히 안전거리를 희생했다가 사고만 난다. 다른 차가 끼어들든 깜빡이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든 가치판단 기능을 꺼버리자. 그건 엄연한 통제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연예인, 지나가는 사람의 패션, 사소한 타인의 비매너, 남의 연애, 배우자의 습관, 비혼주의, 딩크, 문신 등 잘 생각해 보면 내가 통제할 수도 없고, 내 인생에 별 영향도 없지만 무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있는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가치중립 주문을 외우면서 어물쩍 넘어가 보자.


그렇구나. 그런가 보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어때. 다 장단점이 있어. 아니면 말고. 모든 건 그저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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