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창비, 2022, 문학, 한국소설
� 읽게 된 동기 & 책 소개
문재인 전 대통령과 유시민 작가가 추천한 책이라는 점에 이끌렸고, 극찬을 쏟아내는 독자들의 리뷰를 보고 선택했다.
이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3일간의 장례식장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빨치산의 딸’로 힘들게 살아온 딸이 장례를 치르는 동안 자신의 시선으로 아버지의 삶을 되짚고, 조문객으로 온 주변 인물들에 대한 기억을 통해 단순히 빨치산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새롭게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다.
✍ 마음에 새긴 문장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단 한순간도 유물론자가 아닌 적이 없었다. 먼지에서 시작된 생명은 땅을 살찌우는 한줌의 거름으로 돌아가는 법. 이것이 유물론자 아버지의 올곧은 철학이었다. 쓸쓸한 철학이었다. 그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워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사후의 세계를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p.98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 -p.110
“아버지는 알았을까? 자기보다 한참 어린 막내가 면당 위원장인 당신을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했다는 걸, 그 자랑이 당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걸, 그게 평생의 한이 되어 자랑이었던 형을 원수로 삼았다는 걸. (중략) 아무도 보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그날 작은아버지 홀로 견뎠어야 할 공포와 죄책감을, 보지 않은 누군들 안다고 할 수 있으랴. 역시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만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독한 소주에 취하지 않고는 한시도 견딜 수 없었던 그러한 사정이.” -p.131
“사진 속 문척 모래사장은 지금과 달리 곱고 넓었고, 빛바랜 흑백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 열기마저 식힐 듯 아버지의 청춘은 싱그러웠다. 아직 사회주의를 모를 때의 아버지, 열댓의 아버지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질곡의 인생을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소년 둘은 입산해 빨치산이 되었고, 그중 한 사람은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형들을 쫓아다니던 동생은 형을 잃고 남의 나라에서 제 다리도 잃었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p.196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p.198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이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p.231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 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p.249
“나의 비극은 내 부모가 빨치산이라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내 비극의 출발이었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잇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p.267
� 느낀 점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간결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한 첫 문장이다. 신선한 충격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 책은 해방 이후 70년 현대사의 질곡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으로써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주제를 담아내는 방식은 이처럼 가볍고 유쾌하다. 유쾌한 문장으로 웅숭깊은 주제 의식을 담아낼 줄 아는 정지아 작가의 탄탄한 필력에 감탄했고 부러웠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내공은 아닐 터, 작가의 지난한 삶의 과정이 느껴져 애달프기도 했다.
3일간의 장례를 통해 전직 빨치산 아버지를 보내는 딸의 반성적 이야기이자 애절한 전상서 <아버지의 해방일지>. 서사의 힘이 있어 읽는 내내 작품 속에 빠져들어 울고 웃었다. 재미와 감동을 맛보게 해준 작가에게 존경을 표한다. 더 많은 정지아 작가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앞으로 만나게 될 그의 작품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