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연대하고 예술로 말하는 사람, 전인옥씨를 만나다

by 최연신
KakaoTalk_20251201_105403702_02.jpg

인터뷰―만나고 싶었습니다

�삶으로 연대하고 예술로 말하는 사람, 전인옥 씨를 만나다!

기획 및 취재 최연신(하상매거진 인터뷰어)


많은 사람이 “내 삶은 대하소설 감”이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의 무게를 실어 한 편의 이야기로 빚어 올리는 사람은 흔치 않다. 대부분은 평생 마음속에서만 되뇌고 흘려보내는 이야기를, 연극 무대에 올려 관객과 마주한 사람이 있다. 바로 전인옥 씨다. 1960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선천성 시신경위축으로 실명했지만, 그는 음악 교육과 여성 장애인 운동, 인권 활동 전반에 굵직한 자취를 새겨왔다. 지금은 가톨릭 시각장애인 선교회에서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담당 과장으로 일하며, 극단 ‘다빈나오’를 이끄는 대표이자 무대에 서는 배우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넘어짐과 상실, 불평등과 편견을 지나 다시 말하고, 다시 서고, 다시 걷는 법을 배운 한 여성. 지금 우리는, 대하소설 10권 분량의 삶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전인옥의 이야기, 그 뜨거운 몇 장을 함께 펼쳐보려 한다.


이야기 하나시력 대신 감각하게 된 것, 불평등의 구조


인옥 씨의 어린 시절은 눈앞의 어둠보다, 그 어둠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먼저 마음을 파고들던 시기였다. 선천성 시신경위축으로 시력을 거의 잃고 자랐지만, 충주성심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시각장애인’이라는 말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게 될지 뚜렷하게 느끼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인옥 씨는 조용하고, 걱정이 많고, 겁이 많은 아이였다. 말을 꺼내기 전 한참을 고민하는 습관 때문에 대답이 늦어질 때면, 주변의 오해와 꾸중이 따라붙었다. “생각 중이에요.”라는 말 하나를 익히기까지, 그는 적지 않은 서러움을 견뎌야 했다.

그가 처음 맞닥뜨린 차별은 학교가 아니라 집 안에서였다. 남아 선호가 강했던 시절, 친할머니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설명되지 않는 구타와 통제를 가했다. 남자 형제들과 똑같이 잘못해도 혼나는 건 늘 인옥 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깨달았다. 잘못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가치를 두던 시대의 기준과 여성을 순종적인 존재로만 보던 뿌리 깊은 관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또래보다 어린 나이에 입학하고 체구도 작았던 그는 뜻밖에 많은 호의를 받았다. 집에서 억압받던 그에게 학교의 따뜻함은 낯설고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다가왔다. 그 경험들은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세상에서 그가 처음 마주한 벽은 장애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과된 보이지 않는 경계였다는 것. 인옥 씨의 어린 시절을 관통한 핵심은 바로 이 불평등이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보다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 더 아팠어요.”

그의 이 말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훗날 그의 삶을 이끄는 문제의식의 시작이었다. 언어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그는 이미 자신이 놓여 있는 세계가 평등하지 않다는 감각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불평등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아이.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 숨기보다, 그 시선의 방향을 끝내 이해하려 했던 아이. 그 감각은 자라나 훗날 여성단체 활동, 성폭력·가정폭력 상담, 그리고 시각장애 여성의 권리라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삶의 첫 불씨가 되었다. 세상이 가두는 정의가 아닌, 스스로 선택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질문이 그때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야기 둘“편견을 깨기 위한 선택들”


1980년대 초, 시각장애 여성이 대학에 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인옥 씨에게도 대학은 집안 배경과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허락되는 남의 세계였다. 그래서 중고교 시절,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이유조차 찾지 못했다.

“대학에 가지 못한다면, 나는 무엇을 향해 공부해야 할까. 공부의 목적이 뭘까?”

혼자 끝없는 질문을 이어갔다. 현실은 더 답답했다. 당시 시각장애인의 진로는 거의 안마로만 이어졌다. 적성과 능력은 논외였다. “왜 우리는 모두 같은 길을 강요받아야 할까.” 반발심이 일었지만, 대안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도 안마를 하게 되겠지.”라고 체념하던 그에게, 한 가지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손님을 맞는 순간, 자신의 언어와 교양이 상대의 세계와 부딪칠 텐데, 지금의 자신은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자각이었다. 그 깨달음이, 그를 다시 책상 앞에 앉게 했다.

공부할 시기를 놓쳤다고 여길 즈음, 점자도서관에서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함께 일하던 직원 한 명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불안정한 월급과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오래 망설이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입시에 뛰어들었다.

인옥 씨의 전공은 피아노였다. 전공을 택하는 일은 그에게 고민이라기보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자리해 온 자연스러운 답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 교장 신부님의 사비 후원과 서울맹학교 음악 선생님의 무상 레슨으로 이어졌던 악기가 바로 피아노였기 때문이다. 혹독한 연습에 질려 한때 피아노를 멀리했지만, 그에게 피아노는 ‘은혜를 갚는 길’이자, 시각장애인을 무능한 존재로 보는 편견과 맞설 거의 유일한 무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피아노뿐”이라는 생각은 절망이 아니라, 편견을 깨고자 하는 의지로 변해 그를 단국대 음악교육과 합격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은 영웅담과 거리가 멀었다. 중증 시각장애 학생은 그가 유일했고, 같은 과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에는 현실의 벽이 높았다. 강의가 끝나면 혼자 휴게실에 앉아 있는 날이 많았고, 도움을 청할 친구도 없었다. 그는 “나는 공부하러 왔지, 놀러 온 게 아니다”라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그 말로는 채워지지 않는 고독이 늘 남았다.

“시험을 앞두고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던 어느 날, 문이 열리며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어요. 시각장애인이 연주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였죠.”

호기심과 신기함이 섞인 시선. 사람들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시각장애인을 ‘특별한 존재’로 보았지만, 그의 일상은 그저 매일의 연습과 불편함,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그때의 외로움과 단절, ‘특별한 존재’로 소비되던 피로감, 매 순간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던 경험들이 훗날 인권 활동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그 모든 불편함과 고독이 내 삶의 방향을 정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죠.”

피아노는 그를 대학으로, 그리고 결국 시각장애 여성운동의 현장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는 징검다리였다.

이야기 셋“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시각장애인여성연합회(아래 여성연합회)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리며, 전인옥은 “너무 용감하고 너무 무식했던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제가 시각장애인 여성 당사자인데 못할 게 뭐 있겠어? 하는 생각으로 선뜻 들어갔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던 현실은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여성장애인의 삶이었습니다.”

1960~70년대, 시각장애 여성들은 집 밖에서 꾸준히 일을 하며 가정의 수입 대부분을 책임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집 안의 위치는 언제나 가장 아래였다. 하루 종일 몸을 혹사해 벌어온 돈은 남편이 ‘당연히 가져가야 할 것’처럼 여겨졌고, 생활비라는 명목으로 전부 빼앗기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상담실에서 마주한 이야기들은, 같은 시각장애 여성인 전인옥조차 처음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 있을 수 없는 일은 믿기 힘들 만큼 흔했다.

그의 문제의식은 사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학생자치회에서 남학생들은 당연하다는 듯 부장을 맡고, 여학생들은 차장으로 밀려났다. 어느 해, 선생님이 음악부장을 제안했을 때 남학생들이 “여학생이라서 안 된다”고 막아 세웠다. 졸업을 앞두고는, 이미 남학생들만 모여 회칙을 다 만들어 놓은 뒤 여학생들을 교실에 불러 승인만 해달라고 했다. 그는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결정 권한은 언제나 남성에게 있고, 여성에게는 사후 승인만 요구된다는 현실을 그는 그때 체감했다.

여성연합회에서의 일은 그 기억과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어느 시각장애 여성은 남편에게 경제권과 일상을 모두 통제당하다 치료 시기를 놓쳐 결국 실명에 이르렀다.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그녀가 집을 뛰쳐나와 동사무소를 통해 여성연합회에 연결되었고, 인옥 씨와 동료들은 이혼 소송을 도왔다. 남편은 알코올 문제로 가정을 파탄 내던 사람이었다. 긴 싸움 끝에 그 여성은 요양시설로 옮겨졌고, 마침내 숨을 쉬는 법을 다시 배운 사람처럼 웃을 수 있었다. 인옥 씨는 말한다.

“저는 가정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여성의 희생이 강요되면서 유지되는 가정은 가정이 아니죠.”

현장은 곧 제도와 맞붙는 싸움으로 이어졌다. 여성가족부의 ‘여성장애인 어울림센터’ 사업이 복지부로 이관되며 다른 교육 사업과 유사·중복된다는 이유로 예산이 잘려 나가려 했을 때, 그는 곧바로 문제를 감지했다. 장애 여성도 분명 여성인데, 왜 여성정책 밖으로 밀어내려 하는가. 그는 국회 토론회에서 “두 사업은 구조도 목적도 다르다”며 논리를 반박했고, 기재부를 찾아가 항의하고 1인 시위까지 이어갔다.

싸움은 쉽지 않았다. 같은 현장의 복지관들조차 각자의 이해관계 때문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결국 어울림센터를 지켜내지는 못했지만, 그는 그 시간을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시기로 기억한다.

그 모든 경험의 바닥에는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 차별이 이어지는 이유, 목소리가 사라지는 이유. 그것은 대부분 아무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전인옥은 지금도, 침묵이 강요된 자리에서 먼저 입을 여는 사람으로 남고자 한다. 세상은 느리게 변하지만, 그는 안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많아질 때, 비로소 제도가 변하고 그 변화가 다시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 넷“무대는 나를 다시 살게 했다.”


인옥 씨의 삶에서 연극은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그러나 한때 그의 세계에서 연극은 가까이하고 싶어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대학 시절, 그는 교정 어딘가에서 공연이 막 올랐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그 무대 앞까지 다가갈 형편도 여유도 없었다. 클래식 음악은 라디오를 통해서라도 들을 수 있었지만, 연극은 몸으로 마주하지 않는 이상 결코 닿을 수 없는 세계였다. 그 미지의 무대에 대한 갈증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고, 마음 깊은 곳에 한처럼 오래 맺혀 있었다.

1987년 한국맹인이료연구회에 입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동료들과 함께 처음 극장 문턱을 넘었고, 연극·음악회·영화를 닥치는 대로 찾아다녔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이 무대까지 안내해 주고, 배우나 스태프의 동선과 표정, 조명의 변화를 설명해 주었다. 그는 그 설명을 더듬어 무대의 질감을 상상했다. 그때까지도 “언젠가 무대에 서겠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그에게 연극은 그저 마음껏 보고 싶었던 세계였다.

무대가 그를 불러낸 건 훨씬 뒤였다. 2010년, 여성연합회가 장애인재단 사업에 연극 프로젝트를 제안하면서였다. 교육과 공연을 잇는 기획이었고, 그는 직원 자격으로 자연스럽게 연습실을 처음 밟았다. 김지원 연출과의 만남도 그때 이루어졌다. 첫 작품의 제목은 ‘공연은 지금부터’. 극 중 이름도, 인물도 모두 “전인옥”이었다. 자신의 삶을 재료 삼아 장면을 엮어가는 형식. 조명이 얼굴을 스치는 온도, 숨을 고르는 소리, 객석의 기척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제야 비로소, 연극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내는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이듬해 연극 〈가족〉(초기 제목 ‘할 수 있는가’)에서 엄마 역할을 맡으며 무대와의 인연은 더 깊어졌다. 하지만 힘든 연습으로 오후 업무를 거의 보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자, 대표는 결국 “이제 그만하라”고 말했다. 그는 “그래, 연극은 여기까지구나”라며 마음을 접었다.

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3년, 극단 ‘다빈나오’ 창단 공연을 앞두고 김지원 연출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가족〉의 엄마 역할을 다른 배우들과 맞춰봤지만, 어딘가 비어 있다는 고백과 함께였다. 대표의 반대와 연출의 설득 끝에 “그 대신 일은 더 열심히 한다”는 조건으로 다시 무대에 섰고, 창단 공연을 마친 뒤 또 한 번 스스로에게 선을 그었다. ‘이제 정말 끝이다.’

그러나 무대는 끝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여성연합회 성우교육·낭독극 사업에 참여했다가, 결국 〈맹진사댁 경사〉 낭독극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처음엔 교육만 듣고 빠지려 했지만, 가을 공연이 다가올수록 “조금만 도와달라”는 요청이 이어졌고, 어느새 손에는 대본이 쥐어져 있었다. 그 과정은 훗날 또 다른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변화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왔다. 2012년, 암 투병 끝에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그는 “엄마를 따라 죽고 싶었다”는 말을 주변에 털어놓을 만큼 깊은 상실 속에 빠졌다. 김지원 연출은 그 이야기를 극으로 만들어보겠다며 곧바로 작가에게 의뢰했다. 한 여성의 상실과 생·죽음의 경계, 남겨진 자의 시간을 그린 소리극 〈옥이〉의 초고가 그렇게 탄생했다. 그의 이름을 딴, 사실상 그의 이야기였다.

2017년 초고가 도착했을 때, 연출이 염두에 둔 주인공 역시 전인옥이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여성연합 대표였다. 책임은 무거워졌고 한정된 시간은 그를 더 옥죄었다. 초연과 2018년 앙코르 공연까지는 다른 배우가 〈옥이〉를 맡았다. 그럼에도 연출은 “언젠가는 꼭 직접 서야 한다”며 포기하지 않았다.

2019년, 세 번째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그는 이미 여성연합회를 떠나기로 결정한 뒤였다. 더 이상 업무 때문에 못 한다는 이유는 통하지 않았다. 인옥 씨는 생각했다.

‘이제 나를 불러줄 무대가 또 있을까.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무엇보다 〈옥이〉는 자신의 이야기였다. 내 이야기니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 그를 또 한 번 무대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웃으며 덧붙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딱 제 얘기죠.”

주인공으로 서 본 무대는 그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험난했다. 대사를 외우고, 동선을 익히고, 익숙지 않은 몸의 움직임을 반복 연습하는 매 순간이 시험이었다. 연습이 끝나고 함께 차를 타고 나오며 그는 동료 배우들에게 “내가 이거 잘못한 것 같아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었다. 나중에 돌아보니, 각자의 극단에서 단련된 프로 배우들 사이에서 주인공이란 사람이 힘은 못 줄망정 후회만 쏟아낸 셈이었다. 그 생각을 떠올리며 그는 “참 건방졌구나 싶었다”고 쑥스러워했다.

그럼에도 〈옥이〉는 그를 다시 살게 한 작품이다. 중증 시각장애인인 그가, 장애·비장애 배우들이 함께 서는 극단 다빈나오의 무대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삶을 연기한다는 것. 그것은 도전이나 취미가 아니라, 살아온 시간을 통째로 다시 발화하는 일에 가까웠다.

다빈나오는 처음부터 시각장애인만으로 꾸리는 극단이 아니다. 여러 장애 유형과 비장애 배우들이 뒤섞여 작품을 만든다. 그는 이 방식을 특히 소중히 여긴다.

“시각장애인만 힘들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장애 유형은 자기들만 어렵다고 생각하잖아요. 같이 작업해 보면, 모두가 다 어렵다는 걸 알게 돼요. 각자 다른 방식으로요.”

경증과 중증, 장애 유형마다 겪는 곤란의 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는 연습실과 무대에서 몸으로 배웠다. 그래서 다양한 장애 유형이 섞여 함께 작업하는 방식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래야 무대 위와 아래에서 서로의 삶이 진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배리어프리 공연에서 라이브 음악과 수어, 해설이 함께 섞이는 순간도 그에게는 각별하다. 녹음된 음향 대신 곁에서 바로 울려 나오는 피아노와 타악기, 배우의 대사와 수어 통역사의 손짓, 해설자의 숨 고르는 소리가 한 무대 위에서 겹쳐진다. 그는 이런 자리를 “서로의 호흡이 더 잘 느껴지는 무대”라고 부른다. 연극이 보여주는 예술을 넘어, 함께 살아내는 예술이 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지금, 〈옥이〉의 이야기는 국경을 넘고 있다. 2024년 11월, 그는 프랑스 장애인 예술 축제 ‘이마고 페스티벌’의 사전 프로그램 ‘Imago Plateau’에 초청받아 15분 쇼케이스를 올렸다. 열흘 남짓 프랑스에 머무르며 단 하루 공연과 여러 워크숍을 소화했다. 짧은 맛보기였지만, 그 15분이 전막 초청으로 이어졌다. 내년 가을, 프랑스의 한 극장에서 〈옥이〉 전막이 공연될 예정이다. 구체적인 극장과 일정은 조율 중이지만, 그는 이미 한국의 한 여성, 한 장애인의 이야기가 프랑스 관객 앞에 서는 순간을 마음속에 그려보고 있다.

더 멀리 내다보는 꿈도 있다. 그와 연출이 함께 오래전부터 품어온 목표, 세계적인 연극 축제 아비뇽 페스티벌 ‘인-페스티벌’ 초청이다. 자비로 참가하는 오프 페스티벌이 아니라, 공식 초청작으로 서는 것. 특히 중증 시각장애인이 주인공인 작품이 그 자리에 선다면, 한국 장애인 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여는 일에 가깝다. 2026년 한불 수교 150주년을 맞아 해당 해 아비뇽 페스티벌의 공식 언어로 한국어가 채택되었다는 소식은 그 꿈에 작은 현실감을 보태준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이건 제 개인의 영광만이 아니라 한국 장애인 연극계 전체, 특히 극단 다빈나오의 역사에 남을 일이지요.”

〈옥이〉를 연기하는 매 순간, 인옥 씨는 생각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닿을 ‘한 사람’을. 그가 장애인이든, 그저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이든, 혹은 아주 먼 곳의 누군가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국경과 언어를 넘어 누군가에게 온전히 가닿는 일이다.

“무대는 나를 다시 살게 했어요. 인생은 60부터라는 말, 제 얘기 같아요.”

그 말처럼 그는 지금도 여전히 무대 위에서, 그리고 무대를 향해 걷는 길 위에서 여러 번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야기 다섯인생 후반부의 새로운 선택들, ‘멈추지 않는 사람’


“지금이 가장 바쁘고, 지금이 가장 재미있다.”

인옥 씨의 이 말은 처음 들으면 믿기 어렵다. 강의, 연극, 종교 활동까지 이어지는 빼곡한 일정을 그의 나이와 장애를 떠올리며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그는 자신을 천성이 게으른 사람이라고 한다. 미리 준비는 못 하지만, 막상 마감이 닥치면 믿기 힘든 집중력을 발휘하는 사람. 그 느긋함과 몰입이 공존하는 방식은 그의 인생 2막을 지금처럼 바쁘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 변화의 출발점에는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이 있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몸을 쉬지 않던 어머니, 그리고 병이 깊어져 몸의 기능을 잃어가던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이렇게 되겠지. 그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움직여야 한다.”

그때부터 연극 제안도, 강의 요청도 웬만하면 다 수락했다. 어쩌면 어머니 몫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의 삶은 어느새 1년 중 360일이 움직이는 일정표가 되었고, 그런 그를 보며 활동지원사는 늘 건강을 걱정한단다. 그런 그에게 지금의 삶은 기적에 가깝다. 강의장에서 편견을 깨고, 무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하며, 종교 공동체 안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콤플렉스였던 그의 목소리는 성당에서 9년 넘게 해설을 맡으며 어느새 감사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꿈을 묻자, 그는 조심스럽게 “방송”을 말했다. 대학 시절 라디오 DJ를 동경했고, 주변에서 “DJ 같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 어딘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긴장을 잘하는 성격이지만, 그는 안다. “또 시작하면 또 해낸다”라는 것을.

현재 그는 가톨릭 시각장애인 선교회에서 장애 인식 개선 강사이자 실무자로 일하고, 동시에 극단 다빈나오의 대표이자 배우로 무대에 선다. 이미 전화 음성 프로그램과 ‘생활 성경’ 유튜브 낭독 등 작은 방송들은 그의 일상에 들어와 있다. 언젠가 진짜 마이크 앞에 서게 된다면, 그것은 그의 인생 3막을 여는 또 하나의 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이 제일 바빠요. 그런데 또, 지금이 제일 재미있어요.”

그의 인생은 서로 다른 결의 경험들이 겹겹이 쌓여 오롯한 한 사람의 생을 이루고 있었다. 인옥 씨는 오늘도 쉼 없이, 자신이 선택한 속도로 그 다채로운 삶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 그가 앞으로 어떤 새로운 길을 펼쳐 보일지, 그의 다음 삶이 더 기대된다.

------------------


�������


�출처: 시각장애인을 위한 월간문화교양지 하상매거진 2026년 1‧2월호(통권 제168호)

#하상매거진 #하상장애인복지관 #인터뷰 #시각장애인 #배리어프리 #전인옥 #극단다빈나오 #옥이

�전문은 개인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스토리 https://brunch.co.kr/@chldustls

스텔라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chldustls

3.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mary_stella68

4.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chldustls

매거진의 이전글탠덤 사이클 파일럿 조선 선수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