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
방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앞에 서면 묘한 포만감이 차오른다. 매달 도서 구매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다. 문제는 책을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저 사 모으는 행위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사유가 빈곤하다 느껴질 땐 철학책을 집어 들며 생각의 근육이 붙은 듯한 착각에 빠지고, 삶의 토양이 메말랐다 싶을 땐 소설이나 인문학 서적을 결제하며 마음의 평수를 넓히고,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땐 자기계발서에 기대어 금방이라도 세상을 바꿀 듯한 동력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솔직해지자면, 일종의 ‘지적 허영심’이다. 읽지 않은 채 빽빽하게 꽂힌 책들은 그저 장식장에 가깝고, 책을 사는 행위만으로 이미 충분한 사유를 마친 듯한 착각에 머물렀던 적이 더 많기 때문이다. 지난해 나 자신과 했던 ‘책을 많이 읽자’는 약속은, 조금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간절함의 표현이었다. 때로는 목적 없이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책장을 넘기는 행위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었지만, 늘 아쉬운 점은 남았다.
가장 큰 문제는 허망하게 사라지는 기억력이다. 정성껏 정독하며 고개를 끄덕였던 문장들도 책장을 덮고 나면 마술처럼 휘발되어 버린다. 사유의 근육을 키우고 싶어 시작한 독서가 그저 눈동자의 운동에 그치지 않으려면 무엇인가 필요했다. 그렇게 마주한 해결책이 바로 ‘필사’다.
사실 필사를 처음 시도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이내 중단되었고, 책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올해, 다시금 새로운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는다. 이번에는 좀 더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에 유튜버들의 필사 방법론을 찾아보았다. ‘장비빨’이라는 말처럼 마음에 드는 문구류도 하나둘 사 모았다. 사각거리는 펜촉의 질감과 손에 착 감기는 노트의 무게감이 더해지니, 비로소 무언가를 시작할 준비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이제 다시 펜을 든다. 단순히 텍스트를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둥둥 떠다니던 문장에 묵직한 닻을 내리는 시간이다. 지적 허영심을 기분 좋게 인정하며, 이제는 그 껍데기를 지나 문장의 속살까지 깊숙이 만져보려 한다. 올해의 필사는 멈추지 않는 지속적인 대화가 되기를, 그리고 내 책장에 꽂힌 저 수많은 목소리가 마침내 나의 단단한 사유로 치환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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