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숱하게 많이 했다. 그럴 때면 머리로는 나보다 더 한 사람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처한 현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죽겠다는 생각만 한다.
자살을 하는 건 순간의 충동이라고들 한다. 그런 연구 결과도 있다는 말을 인터넷 어디에선가 본 것 같기도 하다. 뭐가 확 씌어서 순간적으로 극단적인 결정을 하는 거라고.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건 내내 생각만 하는 사람이건 견뎌야 하는 무게는 다 똑같다. 누가 누구의 고통을 알 수 있다는 위로의 말들은 전부 헛소리다. 어떻게 당사자가 돼보지도 않고서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처음으로 카드빚으로 인한 채권추심 전화를 받은 후 빚쟁이가 된 기분이 들었을 때,
들어올 돈도 없는데 지갑에 달랑 사천 원 남아서 당장 오늘 저녁 식사를 걱정했을 때,
당장 일을 해야 하는데 하는 일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때려치우고 나온 후 자괴감을 느낄 때,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졌다고 느낄 정도로 타인에게 인간적인 무시를 당할 때,
특히 하는 일없이 매일 술병만 비우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이 밑도 끝도 없이 들 때마다 식상한 말이지만, 난 가족들 생각을 했다. 하나밖에 없는 핏줄인 동생과 그의 가족, 자신들의 삶을 일정부분 희생하며 나를 키워주다시피 한 삼촌과 숙모를 생각하며 극단적인 선택은 피할 수 있었다. 솔직히 용기가 없기도 했다. 그저 술에 취해 드는 이런 저런 생각일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난 그런 상황에 빠져 있다가도 주기적으로 활동을 하면 금새 회복을 하고 현실로 돌아오는 스타일이었다.
하긴..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다. 누가 누구에게 설교를 할 수가 있나.
요즘 유난히 유니세프 같은 단체의 광고가 많이 보인다. 그런 광고들 중에서도 눈에 띄고 더 쉽게 공감을 하게 되는 건 우리나라 사람의 사연이 소개될 때다. 한창 공부를 해야 하는 나이에 지적 장애인인 부모와 한참을 어린 동생을 부양하고 보호해야 하는 여중생의 사연은 볼 때마다 마음이 찡해진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무래도 정기적이지 못한 도움이 될까봐 망설이기만 한다.
열다섯밖에 안된 그 여학생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을까. 지적 장애인인 부모의 실수로 아직 유치원도 못 다닐 나이의 동생이 화상을 입은 것을 목격했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 그 여학생은 아마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극단적인, 그런 한심하고 못된 생각도 여유가 있으니까 하는 생각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으면 그런 잡념은 끼어들 새도 없을 것이다. 그 여학생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각자 지닌 고통의 무게가 비슷할까, 라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을 것이다. 그런 아이도 있으니 내가 가지는 잡념은 그 자체가 사치다. 이렇게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면.. 그건 과연 억지일까?
절망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예의라는 것이 있다. 그건 좀 지키자. 사는 게 힘들고 서럽다고 느껴질 때가 많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학생보다는 많이 살고 많은걸 누려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