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뭣도 없어도 “나도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는 쓸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는 않았다. 그냥 어서 빨리 TV에 나오는 드라마를 쓸 수 있는 유명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다 우연히 소설을 한번 써보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당시 준비 중이던 미니시리즈 대본의 일부분을 소설화 시켜보기 시작했다. 그냥 막 썼었다, 그렇게 꽤 썼었다. 훌륭한 결과물은 아니었고 끝을 내지도 못했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어쩌면 소설도 쓸 수 있겠구나.’
그 후로도 한동안은 소설은 쓰지 않았다. 진지하게 생각지도 않은 건 물론이고 소설가로서 보다는 드라마작가로 성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훨씬 강했었다. 처음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처음 써본 글이 드라마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쯤 해서 전자출판 활성화에 대한 소식들을 많이 접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한 방송사의 장편 연속극 공모에서 다시 한 번 낙방을 한 후 드라마를 쓰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고민스런 생각이 많이 들었던 때이기도 했다. 공모전으로 입상을 한 후에도 이렇다 할 비전이 보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서른네 살 때였던 것 같다. 소설을 한번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렇다 할 결과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실이 너무 한심하고 창피했다. 소설은 어떻게든 출간만 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단편 소설도 써본 적 없는 주제에 장편 소설을 쓸 배짱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궁금하다.
그러나 자신감은 중요하다. 예술가로서 일종의 프라이드라고 생각한다. 그게 없으면 쓸 수가 없다.
난 결심하고 일 년 만에 장편 소설 한권을 써냈다. 생에 첫 책이라 뭣도 모르고 기대를 많이 했지만 별로 팔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백페이지짜리 소설 한권을 끝냈다는 건 어떤 성취감 비슷한 것을 느끼게 했다. 그때부터였다. 드라마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은 건. 그렇다고 당장 소설가로 어떻게 될 것 같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일단은 썼다.
드라마를 쓸 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제일 등급이 낮은 반이었다. 육 개월 동안의 미션은 칠십 분짜리 단막극을 한편 완성하는 것이었다. 먼저 시놉시스를 제출해야했는데 제출한 시놉시스를 읽은 선생님이 나에게 찬사를 보내셨다.
그때 처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천잰가?’
하지만 내공의 부족이었던 건지, 너무 파격적인 설정이라 마무리가 힘들어서였는지 난 제출한 시놉시스를 갈아엎고 평범하디 평범한 가족드라마를 어설프게 써서 제출했다. 욕을 엄청 먹었다. 같은 반 동료들도 아쉬워했다.
그리고 일 년 후, 세 번째 반에서 마음의 소리에 이끌려 노인들의 사랑이야기를 썼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괜찮은 단막극을 한편 봤는데, 그저 나도 그런 대본을 한편 써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써냈다. 그 대본을 본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건 마음으로 쓴 글이다.”
앞서 다른 대본을 먼저 심사한 직후였는데 비교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다시 한 번 들었다.
‘난 정말 천잰가?’
지금의 내가 생각을 해봐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나에게 그런 극찬을 해주셨던 그 선생님은 1990년대 트렌디드라마의 시초라 불렸던 최수종 주연의 ‘질투’라는 미니시리즈의 대본을 쓰셨던 분이었다. 유동근 주연의 ‘애인’이라는 드라마도 쓰셨다고 들었다.
지금의 난 많이 겸손해졌다. 그때보다는 나이도 많이 들었고, 그만큼 좋은 책도 많이 읽었다. 나 정도는 엄두도 못 낼 만큼 좋은 글을 쓰는 훌륭한 작가가 너무 많다는 걸 알아버린 뒤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겸손이다.
그러나 난 아직 자신이 있다. 훌륭한 작가가 많은 만큼 수준 이하의 글을 써내고 책을 펴내는 사람들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아직은 번듯한 성과 하나 없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거라 생각하다.
그러나 자신감은 중요하다. 예술가로서 일종의 프라이드라고 생각한다. 그게 없으면 쓸 수가 없다. 끝까지 재능에 대한 비관만 하고 좌절만 할뿐이다. 그럴 바에는 당장 뭣도 없어도 “나도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는 쓸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난 꽤 글을 잘 쓰는 작가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상당히 중요하다. 글을 오래, 평생 쓰고 싶다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