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처음 한 문장이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내가 책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현실로 옮겨도 되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글들이다.
물론 처음에는 어설펐다. 당연하다. 그런 감상문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 번도 써본 기억이 없으니까. 초기 포스팅들은 다시 고쳐 쓰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들도 추억이고 흔적이니까.
내가 전문가 뺨을 치고도 남을 영화리뷰를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서평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블로그의 카테고리에 이름을 이렇게 썼다.
‘영화를 보다가 문든 든 생각’
‘서재’
지금은 이름이 좀 바뀌었다. 두 달 전인가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에 블로그 꾸미는 것을 좀 배웠고,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 이름도 조금 색다르게 했다. 지금 보면 그거나, 그거나 인 것 같긴 하지만. 좀 유명한 블로그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작명에 꽤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노출은 전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방문자수가 그전보다 조금 늘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 숫자의 증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최소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재미는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쓰다보면 뭔가 예전과는 다르다는걸 느끼는 날이 올 것이고, 그전에 썼던 글들과 비교해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보이니까. 재미를 느끼는 것, 그게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분량이 많아졌다는 건 할 얘기가 많다는 거다. 그것에 대해 쓰고 싶은 말이 많다는 거다. 뭔가를 보고 감상문을 적는 행위가 익숙해졌다는 뜻이다. 재미를 느꼈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생수, 기생수 파트2>
예전에 배틀 로얄이라는 일본 영화가 있었다.
한 고등학교의 한반 전체를 외딴 섬에 몰아넣고 서로 죽이게끔, 그래야 살아남는.. 결말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런 극중 설정의 원인이 인구 억제 정책 때문이었나..? 역시 그것도 잘 기억이 안 난다.
그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이 있다.
대체 일본 사람들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살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정의 영화를 만들 수가 있단 말인가. 아주 오랜만에 그런 생각이 다시 들었다.
영화 기생수.
단순한 오락 영화는 아니다. 지구와 인간, 공존, 환경 파괴와 같은 꽤 무게감 있는 주제와 관련한 대사들도 제법 나온다. 그건 주인공이 아니라 극중 나쁜 놈으로 분류된 괴물인 기생수들의 입에서 나온다. 생각해보면 주인공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기생수의 비쥬얼에 대한 고민을 꽤 많이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다. 원작 만화가 있다는 건 영화를 보고 난후 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알았다.
찾아보면 파격적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한국이나 중국, 다른 서방국가들의 영화에서
찾아볼수 없는 그런 느낌을 가진 일본 영화는 예전부터 꽤 있었던 것 같다. 괴수영화가 됐건 범죄물이건 에로물이건, 역사물이건.. 많이 찾아보지를 않아서 그런 걸 잘 모를 뿐이지. 최근에 내가 주로 본 일본 영화는 거의 빼어난 영상미의 드라마나 멜로 영화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극단이어도 너무 극단으로만 치닫는다. 한쪽에는 ‘기생수’, 다른 한쪽에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가 있다고 생각해보라.
일편의 파격성에 이편도 기다렸고 역시나 보고 말았다. 액션은 조금 더 화려해졌고 적은 더 강력해졌다. 스케일도 더 커졌다. 조금 몰아치는 부분에서는 ‘어 벌써 끝인가’ 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역시 가장 강력한 적이 하나 더 튀어나왔다. 극의 구성도 꽤나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르적으로는 꽤 준수하나 다시 한 번 보게 될까? 라고 생각하면.. SO SO..
몇몇 배우들에게서 보였던 일본 배우 특유의 과장되거나 어색한 연기가 기억에 남는다.
삼류 깡패의 슬픈 깨달음
<파이란>
배우 최민식이 예전 한 토크쇼에 나와서 자신의 출연작중 제일 기억에 남는 영화를 꼽으라는 진행자의 말에 이 영화를 꼽은 적이 있다. 공감하는 바였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이 영화뿐 아니라 그의 출연작들은 한 작품도 대충 보고 넘길게 없지만. 그러고 보니 머리를 비우고 시간 떼우기로 보는 단순한 오락 영화는 단 한편도 없는 것 같다.
삼류 건달의 슬픈 깨달음..
강재는 한심한 놈이다. 후배의 말에 위장 결혼을 해주고 돈이나 받아먹는, 코흘리개들한테 포르노를 보여주고 구류를 살고, 맡고 있던 나와바리나 뺏기고,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한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뭐 하나 할 줄 아는 것도 별반 없는.. 그래, 정리하자면 쓰레기쯤 되시겠다.
그에게도 꿈은 있다. 번듯한 배 한척 장만해서 고향에 내려가는 것. 깡패 생활을 시작할 때의 꿈은 조직을 이끄는 보스가 되는 것이었겠지만, 이미 벌써 단념한 듯 하다.
어느 날은 보스에게 죽어라고 얻어맞고 같이 술을 한잔 하던 중, 눈엣가시였던 이웃패거리와 싸움을 하다가 살인을 하게 된다. 강재는 용식과 딜을 통해 죄를 덮어쓰기로 한다.
배 한 척 살 돈을 받기로 하고. 언제쯤 자수를 하러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경찰이 찾아와서 이미 잊고 있었던 법적으로는 자신의 아내인 파이란의 죽음을 알게 된다.
파이란은 불쌍한 여자다. 혼자된 몸으로 유언을 따라 고모가 있다는 한국으로 건너왔지만 그 고모마저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린 상태다. 차라리 중국으로 돌아갔다면 좋았으련만.. 파이란은 왜인지 한국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곳 전문가의 주선으로 국적 취득을 위해 위장결혼을 한다. 얼굴도 한번 본적 없는 남자와.
우리나라에는 참 어두운 구석, 그런데서 기생하는 나쁜 놈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그것들도 엄연히 직업이고, 직업인이니 싸잡아 무시하면 억울한가? 어쩔 수 없다. 그들 때문에 우리의 파이란이 갖은 고생을 했으니까.
파이란은 이쁘장한 외모 때문에 처음에는 유흥주점으로 내몰린다. 이쁘장한 외모 때문이 아니더라도 순서가 그런 것 같았다. 그러다가 팔리지 않으면 점점 험한 일로 내몰리는 그런 순서.
업주에게서 소개시켜주는 자리에서 파이란은 피를 토한다. 그래서 흘러간 곳이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있는 할머니 혼자 운영하는 세탁소다.
한동안은 일은 힘들지만 행복한 날을 보낸다. 파이란은 어느새 그곳 생활에 적응을 한다. 일도 씩씩하게 잘 해낸다. 세탁소 사장 할머니에게 인간 세탁기 소리를 들을 정도로. 건조장에 널린 채 바람에 펄럭이는 새하얗게 세탁되어 널린 빨래들을 보며 할머니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인간 세탁기네, 인간 세탁기야!”
파이란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문득 강재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에게 감사의 편지를 쓴다. 결혼해줘서 고맙다고.
그러나 예고됐던 불행이 그녀를 찾아온다. 그녀는 소개소 사장에게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빚 갚을 시기를 조금만 늦춰달라는 부탁을 하지만 그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래서 치료를 받지 못한 파이란은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병들어 죽어간다.
강재는 분명 파이란을 보러 가는 길에 후배가 내민 그녀의 사진을 보는 것조차 질색을 한다. 재수 없게 죽은 애 사진을 들이 미냐며.
그랬던 그가 파이란의 시신 앞에서 갑자기 급격한 감정 변화를 보인다. 진지하게 폼 잡은 그를 다른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어색해할 정도다. 아마 나였어도 그랬을 것 같다. 얼굴 한번 본적 없고, 오는 도중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강재가, 아무리 시신 앞이라고 그렇게 침울해하고 정색하며 화를 낸다면. 그는 그전 경찰서에서부터 변한 모습으로 경찰과 시비가 붙는다. 사람이 죽었는데 뭐가 이렇게 간단 하냐며.
지금 생각해보기에 강재가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된 것이 아닐까. 서툴지만 진심을 다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써내려간 파이란의 편지, 그리고 왜 이제 왔냐며 울며 타박하는 세탁소 사장의 원망 섞인 잔소리, 그리고 곧 감옥에 들어가게 될 자신의 처지, 그녀의 시신,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관계된 사람들..
영화에서야 스토리를 미리 잡아주고 음악까지 깔아주니 감정 잡기 좋다. 절로 이입된다. 그러니 최민식의 오열 장면에 쉽게 공감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파이란이 명작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영화를 본지 한참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된다. 감정이 이해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강재가 느꼈을 감정을 조금도 흘리지 않고 그대로 느끼고 고스란히 체화시켜 표현해낸 배우 최민식의 연기가 정말 대단하구나라는.
감독은 그 한 장면에서 최민식이 해내야 하는 연기를 위해 시간을 무한정 비워뒀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 이제껏 강재로 살아왔으니까 형이 느낀 대로 그냥 한번 해봐.”
촬영까지 장소섭외에 따른 것이 아닌 시간 순이었다고 하니.
물론 촬영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말들이다. 정확한 것들은 아니다. 감독이 한말도 비슷하지 정확한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하지만 굉장히 공들인 장면만은 분명한 것 같다. 최민식은 그 영화를 촬영할 당시 30대였던 걸로 알고 있다. 정말 엄청난 배우다.
최민식은 그때도 이미 대단한 배우였지만 지금 정도는 아니었다. 대단하기는 하지만 국가대표급은 아닌.. 그냥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다. 엄청 잘하긴 했지만.
파이란이 세월이 지난 지금 개봉한다면 어느 정도 흥행을 했을까? 최민식도 인정한 바이지만, 파이란은 흥행에서는 완전히 망했었다. 그때 당시에 ‘공동경비구역 jsa’를 거절하고 선택한 게 이 영화였는데, 과연 그는 선택을 후회했을까, 어땠을까. 그의 속 깊은 진심이 궁금해진다.
‘기생수’는 제일 처음 올렸던 포스팅이었고, ‘파이란’은 최근에 올렸던 것 중 하나다. 차이가 보이는가? 다음은 서평이다.
<센트럴 파크>
기욤 뮈소는 참 부지런한 작가인 것 같다. 거의 일 년에 한번 이 정도 퀄리티와 분량의 장편 소설을 써내는 것을 보면. 직업 소설가여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7년 후를 봤을 땐 이 작가의 상상력도 드디어 고갈이 되어가는구나 싶었다. 재미는 있는 작품이었으나 그전작품까지 있었던 임팩트나 여운 같은 건 상대적으로 부족했으니까. ‘내일’이라는 작품을 읽었을 때도 비슷했다. 역시 기욤 뮈소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새로운 시도는 성공적이었으니까. 그러나 종이여자를 읽었을 때의 사랑에 대한 벅찬 감동, 그리고 가슴을 후벼 파는 시적인 한 줄, 한 줄.. 은 부족했다. 난 솔직히 기욤 뮈소라는 작가의 능력은 딱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가 가진 작가적 재능으로서의 한계라고.
그 후에
구해줘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종이여자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 등등...
이런 주옥같은 작품 목록들.. 그리고 한 십년 정도를 계속 써내오며 명성을 유지한 저력.그만했으면 됐다 싶었다. 작가로서 한 작품도 대표작을 갖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아는 나로선 그만큼 한 시대를 풍미했으면 소설가로서의 삶도 꽤나 성공적이었고 독자들에 대한 서비스도 할 만큼은 한 셈이라고. 그러니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그만 좀 벗어나 이젠 좀 편한 마음으로 살아도 된다고.그런데..그가 또 일을 저질러 버렸다.이 작가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이 쯤 되면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마흔은 이렇게 아프기만 한 건가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읽을수록 더 아픈 책이다. 읽을 때마다 나이가 많아져서 그런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서른다섯이고, 지금은 서른여덟이다. 점점 마흔에 가까워져간다. 그리고 조금 더 마흔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 또 누군가는 아직 멀었다고 말하겠지.
이 책에는 마흔 즈음의 남자들이 살면서 흔히 겪는 에피소드와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담겨 있다.
동창회 명부가 나왔다며 오랜만에 걸려온 동창과의 전화에서 벌써 생각보다 많은 이들의 죽음을 알게 되고,
갑자기 아내에게 이혼을 통보받았는데 알고 보니 그 이유가 먹고 살기 바빠서 등한시한 사랑의 부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씁쓸해 하고,
고향에 가서 만난 친구들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서로의 수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대화를 단절당한 경험,
까페의 사장이 불청객이라고 생각했던 한 못생긴 또래 여자가 사랑하는 방식을 보고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어릴 때는 그렇게 사이좋게 지냈던 형제들인데 어머니 부양 문제로 서로 발뺌을 하는 모습에 장남으로서 변한 자신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사내 정치에서 중립을 지키려다 따돌림을 당하고,
사기 아닌 사기를 당해서 벌써 꽤 오랫동안 적자를 보며 가게를 운영 중인 한 남자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대화를 나눴던 앞집 사장의 자살 소식을 듣고,
이것 말고도 몇 가지가 더 있다.
다행인 것 하나는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마흔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난 결혼해서 처자식이 있어서 그로 인해 생기는 갈등 같은 것을 겪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한 이십년은 부어야 되는 아파트 대출 같은 것도 없다. 시골에 있는 친구들이 너무 잘 살고 있어서 그들과 비교될 일도 별로 없고, 나름 예술을 한답시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회사에 매어 있는 몸도 아니라 해고로 인한 걱정, 사내 정치 싸움 때문에 걱정, 오르지도 않는 월급 때문에 걱정할 것도 없다. 부양해야 될 부모 때문에 형제들과 다툴 일도 아직은 없다.
하지만 반대로 보통의 또래들이 겪는 일들을 대부분 겪어보지 않아서 나름 글을 쓴답시고 사는데 상대적으로 빈약한 인생경험으로 인해 부족한 글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차원이 다른 걱정이 있기는 하다.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가 백퍼센트 내 이야기는 아니지만, 난 어떻게 보면 더 심각한 상태이다. 아직 건강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체력은 점점 떨어져 가는 게 보이고, 가끔 한 번씩 아프기라도 하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든다. 구태의연한 말이지만 혼자이니 더욱 몸 관리를 잘 해야 되겠다거나, 지금이라도 누군가를 만나서 함께 사는 것은 어떨까하는.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지금 서른은 예전 서른이 아니고, 지금의 마흔 역시 예전의 마흔은 아니겠지만, 마흔이 주는 어감은 지금도 조금 무겁다. ‘꽃미남 영화배우 오빠들이 어느새 마흔’ 은 그들만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병헌이나 차승원이 마흔일곱 살이라고 누가 믿겠는가? 아직도 팔팔해 보이는 근육질에 웬만한 이, 삼십대보다 더 매끈한 피부와 세련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데.
나 역시 ‘쉰’이라는 지천명의 나이가 이제 12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한눈 조금 팔고 여차하면 그 나이가 올 것이라는 걸 겪어봐서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벌써부터 쓸데없이 긴장이 되곤 한다.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글을 쓴다. 애초에 난 직장 생활이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평생 놀이처럼 할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그게 ‘글쓰기’였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전부 그것을 직업화하지는 못 한다는 건 몰랐지만. 그러나 차라리 그때 몰랐던 게 다행일수도 있다. 한국에서 이름 없는 평범한 작가로 살기가 어렵다는 걸 알았더라면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난 얼마 전 미루고 미루던 출판업 등록을 하고, 드디어 사업자 등록까지 마쳤다. 사업자 등록까지 하고 나니까 좀 더 긴장이 되고 벌려놓은 일을 제대로 해나가고 수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직업화하려면 얼마나 더 걸릴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난 대기업을 다니는 사람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그들의 미래가 어느 정도 예상이 됐기 때문이다. 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난 내가 선택하고 걸어온 길이, 아직 완성과는 한참 거리가 먼 단계이지만 자랑스럽다. 그리고 내 선택을 사랑한다.
그러고 보니 책속에 나오는 마흔은 대부분 조금씩 위기를 느낄 나이의 직장인, 위태위태한 생계형 자영업자들이었나? 앞서도 얘기했지만 애초에 나와는 조금 다른 사람들의 사연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내가 그 우울한 범주에 들어있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나여서.
이것도 그렇다. ‘센트럴 파크’는 첫 번째 서평이었고,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는 가장 최근에 올린 서평 중 하나이다.
뭐 차이는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딱 하나만 얘기하자. 일단 분량이 많아졌다는 건 할 얘기가 많다는 거다. 그것에 대해 쓰고 싶은 말이 많다는 거다. 뭔가를 보고 감상문을 적는 행위가 익숙해졌다는 뜻이다. 재미를 느꼈다는 말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처음 한 문장이 중요하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재미없는 쓰레기 같은 영화를 본 후의 욕부터 시작해도 된다. ‘폰질’하듯이 한 문장으로 일단 ‘시작’ 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