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먹고 사는 건 무섭지 않다
나는 만 26세에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졸업한 남자들이 대부분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나이다. 하나 직장에 계속 있었다면 20년차다. 나는 그 20년 동안 10개가 넘는 곳에서 월급을 받았다. 가장 긴 건 4년, 가장 짧은 건 3개월이다. 뉴욕과 서울을 오가면서 일을 했다. 이력서에 했던 일의 직종을 적는다면 광고 회사 PD, 홍보영화 감독, 이벤트 기획, 신문사 기자, 대학 강사, 라디오 방송국 기자, 도매상 점원, 리테일 매니저, 다큐멘터리 감독, 부동산 브로커, 방송 코디네이터등으로 다양하다.
전혀 화려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이력이다. 원하고 계획한 길도 아니었다. 늘 호구지책이고 궁여지책이었다. 영화감독은 하고 싶은데 누가 시켜주진 않고, 그렇다고 명실은 가장인데 영화준비 한다면서 무작정 놀 수는 없었다. 기회가 생기면 일단 시작해서 돈을 벌다가 못 견디면 그만두고, 다른 일을 시작했다가 또 그만두고, 한국에 가서 자릴 잡으려다가 여의치 않아 다시 뉴욕에 돌아와 일하고..., 그런 식이었다. 결국 처음 월급쟁이를 시작한지 17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이제는 남에게 월급 받는 일은 죽어도 못한다는 생각에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건 빤한 거짓말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말이라 입 밖에는 못 내도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건 모두들 안다.
나는 겪어봐서 더 잘 안다. 내노라 하는 광고 회사에 다닐 때에는 누구에게 명함을 내밀 때 단 한 번도 꿀린 적은 없었다. 대기업 홍보물을 찍을 때는 35밀리 필름 카메라 뒤에서 ‘큐’를 외치며 수십 명의 스태프들에게 현장에서 왕 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미주 한인 신문사 기자였을 때는 취재현장에서 자주 마주치는 한국 언론사 특파원들이 인사는커녕 아는 척도 안하고 나를 무시했다. 자기들이 보기엔 같은 기자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는 식이었다. 그런 나에게 60대가 넘은 한인 사회의 무슨 무슨 회장님들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박기자님’ 이라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도매상에서 일할 때는 잠시 밖에 나와 담배 피운다고 주인아줌마에게 혼이 났다. 군대도 아니고 뉴욕 한복판에서 잠깐 담배 피운다고, 게으름 부린다고 나이 40에 혼이 났다. 지금 하는 일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은 아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무슨 대단한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고 말하면 위선이다. 한국에 있었으면 안했어도 되는 고생과 수모가 많았다. 얻은 것에 비하면 치른 수업료가 너무 많고 헛되게 보낸 시간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돈을 모으지 못한 것도 그렇지만 어느 한 직종도 전문가라고 내세울 처지가 못 되는 것도 나이 들고 보니 아픈 부분이다. 최소한 10년 이상은 한길을 팠어야 그 부분에 대해서 뭘 좀 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도 한 가지 남는 것이 있다면 배짱과 자심감이다. 원래 생활력이 부족하고 독하지 못한 내가 언제부턴지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고, 어떤 일이 생겨도 다 방법이 있을 거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해병대 캠프를 다녀온 것처럼 마음에 근육이 생겼다. 남의 눈치와 체면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외국 생활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수많은 불법 체류자들이 뉴욕에 와서 접시를 닦고 배달을 하며 가족을 부양한다. 멀쩡하게 대학 졸업한 백인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2008년의 불황이후 미국 전역의 집값이 떨어졌지만 각지에서 뉴욕으로 몰려드는 대졸자들 때문에 오히려 뉴욕의 렌트비는 올라갔다. 직업을 구할 때까지 서빙을 하건 택시를 몰건 어쨌든 버틸 수가 있는 곳이 뉴욕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한국적인 감성을 잃어서 일종의 실수를 한 적도 있다. 2014년 말에 대학동기 두 명을 만났다. 모두 직장생활 20년차로, 한명은 S기업의 주재원으로, 다른 한명은 언론사 특파원으로 뉴욕에 왔다. 이들을 만난 날 오후에 마침 ‘재미있는 일’ 이 하나 있었다. 내가 센트리21이란 대형 할인 의류백화점의 임시직원을 뽑는 면접을 본 것이다. 내가 왜 그런 면접을 봤는지에 대해선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연말은 내가 하는 일 두 가지, 코디네이터와 브로커가 모두 가장 비수기다. 2년을 겪어보니 감으로 아는데, 아무래도 연말까지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매일 사무실에 나와서 인터넷을 뒤지며 시간 보내기도 무료하고 노느니 현금이라도 좀 벌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궁리를 했다. 미국은 11월말부터 1월초까지 임시직 고용이 급격히 늘어난다. 추수감사절에서 크리스마스까지 쇼핑객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대형 백화점과 의류점에서 한시적으로 점원을 많이 고용하기 때문이다. 물건 옮기는 일, 매장 진열하는 일, 옷 개는 일, 계산하는 일, 청소 등 종류도 다양하다. 나는 이미 액세서리 도매상 점원과 뷰티 서플라이 가게 매니저를 해봤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더 좋은 건 근무시간이 유연하다는 것이다. 밤에 일할수도 있고, 주말에만 일할수도 있다. 한 달 일하면 가족들과 스키장 한번 다녀올 정도의 돈이 생긴다. 그래서 센츄리21에 지원을 했더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 장소는 공공 도서관 2층이었는데, 가보니..., 정말 나만 빼고 전부 흑인들이었다. 1차로 몇 가지 문제를 풀어야 했는데, 내용이 ‘손님이 14달러 99센트짜리 물건을 사고 20달러를 주면 얼마를 거슬러 줘야 하는가?’ 하는 식이었다. 주변의 흑인들은 심각한 얼굴로 문제를 풀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난 떨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그날 있었던 얘기를 해줬다. 순수하게 재미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웃기는커녕 친구들의 얼굴이 정말 심각했다.
마치 ‘내 친구가 이렇게 어렵게 살고 있는데, 나는 몰랐구나’ 라며 미안해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오히려 숙연해진 분위기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렸다.(나중에 특파원 친구는 그때 정말 충격을 받았다고 다시 언급했다.)
내가 예전에 벌레와 쥐 잡는 터마이터 일을 시작해보려고 그 일을 하는 친구를 쫓아다니면서 며칠간 실습을 했었다는 말까지 했으면 아마 기절했을 분위기였다. 그런데 터마이터 하는 친구는 지금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번다.
몇 달 후, 후배 한명을 만나 같은 얘기를 해줬다. 그 후배는 법대로 치면 하버드 로스쿨과 마찬가지인 NYU 영화과 대학원을 나왔다. 뉴욕에서 장편영화도 만든 감독이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새로운 영화 준비를 하고 있는 친구다. 역시나 미국 생활 20년인데 그 후배는 반응이 달랐다. 자기도 겨울 방학 때는 수입이 적어 고민인데 좋은 정보를 얻었다며 고마워했다. 우리는 우버(Uber)드라이버 등 요즘 각광 받는 파트타임 일거리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즐겁게 술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