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는지 비디오로 빌려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이 두 번째 감상이었다.
처음에는 김기덕 감독 특유의 다소 잔인하고 선정적인 묘사들과 미쳐가는 장동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것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장동건이 번화가에서 총검술을 하며 진짜로 사람을 찌르는 장면도.
영화는 해병 부대라는 특수한 공간. 그런 공간에서 얘기치 못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간첩잡기에 혈안이 되어 원래부터 반쯤은 미쳐있던 강상병, 결국 뭔가를 잡지만 그건 금지구역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던 동네 양아치와 그의 애인이었다.
규정대로 근무했다는 이유로 강상병은 포상휴가를 가지만 그때부터 그는 반쯤이 아니라 정말로 점점 미쳐가기 시작한다. 휴가를 나와 술로 마음을 달래보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술안주 삼아 떠들어대는 친구들의 모습에 화가 나 술판을 뒤엎고 그런 그의 모습에 실망해 애인은 떠난다. 결국 그는 미쳐가는 상태로 휴가도 조기 복귀한다.
장동건이 오인 사살한 남자의 애인, 마을의 미친 여자를 부대 내 상당수 병사와 간부들이 강간해서 임신을 시키고, 탄로가 나자 병원에 보내지 않고 자체적으로 의무병을 시켜 중절 수술을 시킨다.
그 장면을 포함해서 장동건이 연기한 강상병이 점점 미쳐가며 부대 내에서 사고를 칠 때도 모두가 쉬쉬하면서 조용히 덮고 넘어가려 하는 등의 장면은 요즘 정말 많이 보는 장면 중 하나인 것 같다. 영화가 아닌 현실 속에서. 그런 비합리적인 일을 못 참고 분개하는 사람이 한명 정도 있는 것도 그렇다. 병사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죽어나가도 어떻게든 내부에서 해결하려는 모습은 참 한심했다.
당시엔 조금 파격적으로 느껴졌지만 지금 다시 본 장동건의 연기는 훌륭하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희번덕거리는 그의 눈빛은 무서웠다. 정말 뭔가에 홀린 미친 사람의 눈빛이었다.
어찌 보면 김기덕 감독이라는 이름도 한때를 풍미하고 스쳐가는 브랜드중 하나이다. 현재까지도 그가 제작을 하는 작품은 나오고 있고 가끔은 직접 연출을 하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큰 이슈를 몰고 다니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그건 강우석이나 강제규 같은 감독도 마찬가지다. 현재 잘 나가는 감독들도 그런 날이 오겠지.
그는 홍상수와 비교되기도 했었다. 서로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 많지 않았던 작가주의 감독으로서. 개인적으로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김기덕의 작품을 좀 더 선호한 편이었다. 홍상수가 모호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서 김기덕은 색깔 하나는 확실하니까.
그러고 보면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배우의 연기력보다는 이미지를, 그리고 자신의 연출기법을 중시하는 것 같다. 장동건의 오인 폭격으로 애인을 잃어버리고 미쳐가는 여자를 연기한 여배우의 이미지가 그렇다. 그 작품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 하지만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 여배우는 다른 작품에 잘 나오지 않는다. 정확한건 모르겠지만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너무 강렬한 이미지를 지워내기가 힘들어서 그럴 수도 있고, 스타성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전에 어떤 사극에서 비중이 없지는 않지만 그리 주목받기 힘든 역할로 출연한 장면을 보았다. 해안선 이후 다른 작품에서 보기 힘들었던 것 같은데.. 참 많이 늙었다는 생각을 했다. 세월이 그만큼 지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