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기억이 아니라? 하고 그가 되물었다. 애프터 양을 보고 난 뒤였다. 영화를 끝내길 서너 번을 시도했을까. 조용하고 정적인 쇼트들, 오직 대화와 침묵으로만 견인되는 이야기 때문에 나는 영화를 보던 채로 쉬이 잠들 수 밖에 없었다. 이야기는 여기저기 끊긴 채로 존재했다.
나는 내 서랍 속에 오랫동안 잠든 수동 필름카메라를 생각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필름을 꺼냈을 땐, 슬프게도 필름이 중간에서 찢겨 있었고 단 한 장도 현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 담긴 기억은 하나도 보존하지 못했다. 이제와서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장면은 얇디얇은 빗줄기가 빽빽하게 내리던 날의 충주호에서 몇 장 찍었던 사진이다. 정말 그곳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인상이나 감정이 없는 사실에 불과한 장면. 사진을 통째로 잃어버린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더이상 진실을 말하지 않는 간편한 카메라들을 생각한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장면들은, 내가 불완전함을 사랑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길 바란 사진들은 이미 정해진 알고리즘에 의해 채색되고 되살려진 이미지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나는 다시금 그 사진을 본다고 해도, 내가 사랑했던 그 불완전함을 발견하지 못하리라.
그러자 지워진 불완전함을 다시금 찾아내는 것이 네가 할 일이야, 하고 그가 말했다. 양이 남긴 짧은 영상들 위로 앞서거나 뒤서서 포개지는 제이크의 음성. 양의 죽음 이후 남겨진 영상들을 통해 스스로의 기억을 소생기키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기억이 아니야, 내가 답했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이 그들의 근본적인 기억의 매커니즘을 바꾸진 못할 것이라 말했다. 그들은, 언젠간 다시 돌아갈 것이고, 그러면 또 그들의 기억을 대리할 존재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애프터 양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미래가 아니라고, 그건 지극히도 현재라고 덧붙였다. 나는 오직 사진을 통해서만 기억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약간 부정하는 듯한 시선을 한 그에게 내가 말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야.
언젠가 모든 것을 기억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을 때, 기억하는 것들의 순서를 올바르게 세우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을 때, 나는 이러한 증상에 현상을 칭하는 이름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바랐다. 이것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면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므로. 누군가와 추억을 나누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인지 한 사람과 관계를 오래 맺는 것이 힘들었다. 함께했던 사건을 쉬이 잊는다는 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끔씩 관계의 거리를 벌리곤 했다. 어쩌면 추억거리를 나누거나 있었던 일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것보다 공상하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일지도 모른다. 공상에는 추억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공상은 마치 밟으면 사라지는 계단처럼 일시적으로만 발을 디딜 수 있는 사건들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양이 사랑한 수동 필름카메라, 펜탁스 K1000. 삼각대에 올려진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양이 바라본다. 뷰파인더 안으로 들어온 가족의 이미지는 맨눈으로 보는 장면과 달리 너무 왜소하고, 어쩌면 갸날퍼보이거나 가소로워보인다. 사진의 본질은 그런 것이다.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의 문제. 무엇을 찍기 위해선 무엇을 찍지 않을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문제. 내가 찍기로 마음먹은 사진들은 그래서 늘 별로였다. 주변으로부터 격리된 네모 반듯한 이미지는 더이상 내가 원하던 장면이 아니었다. 그가 불쑥 말했다. 사진 찍을 때만 그런 거 아니잖아. 양은 뷰파인더를 통해 보던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허리를 곧게 세워 나머지 세 명을 바라본다. 나는 확신한다. 그 순간 양은 자신이 어떤 장면을 찍기 위한 카메라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으리라고. 그리하여 그는 카메라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한다. 세 명을 잠시간 바라본다. 결국 자신이 기술적으로 발전한 카메라라면, 꼭 남겨야 할 장면을 남기고 말겠노라는 다짐. 그 순간이야말로 양이 기계로서의 자신을 초월한 순간이다.
왜 다들 사람이 되고 싶어할 거라 생각하죠, 하고 에이다가 제이크에게 되묻는다. 제이크는 에이다에게 양이 사람이 되고 싶어했는지 물었고, 복제인간인 에이다는 다소간 부정적으로 그렇게 답했다. 제이크가 에이다의 되물음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제이크의 물음 뒤에 숨겨진 그의 마음은 양이 그처럼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마 제이크는 양이 로봇이라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관계의 선을 정해놓고 있었을지도.
모든 존재는 근원적으로 기계다. 사람마저도. 교체되고, 노후화되고, 때로 어떤 부분은 갈아끼워지기도 하는. 그리고 모든 존재는 모종의 접속을 기다린다. 타인과의 접속이든, 사물과의 접속이든. 그 접속을 통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으로 환원되는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그것이 환상일지라도 맛볼 수 있으므로. 그러니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부끄러운 일이 전혀 아니다. 양이 자신이 어쩌면 고도로 발달된 카메라라는 사실을 자각하곤, 몸을 일으켜 세 가족을 바라본다. 제이크, 카이라, 미카. 그들은 양에게 손짓한다. 이리로 오라고. 너도 이 사진 속에 꼭 남아야 한다고. 그 순간은 양의 메모리에 저장된다.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연결과 접속을 만들어내는지는 모르고서도, 양은 기꺼이 그 순간을 기록한다. 기록한다는 건 어쩌면 다른 것들을 망각해야 한다는 것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는 천장을 바라보던 눈을 거두어들이고, 쇼파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다. 반대편에 기대있던 나에게 진동이 전해지고, 나는 자연스레 그를 바라본다. (그건 내가 의도한 바라봄이었을까?) 그는 늦게 대답한다. 마치 대답이 자신의 내면에서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하듯. 그가 비로소 입을 열고, 그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문장이 이렇게 들린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기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그는 몸을 일으키며 세계에 작은 진동을 일으켰고, 나는 그 진동에 응답하듯 그를 바라봤으므로. 나는 조금 전에 질문을 했고, 그는 시간의 간격을 두고서라도 대답했으므로. 그러니 우리의 문답이 비어있을지라도, 텅 비어서 아무것도 남길 게 없는 순간일지라도.
우리의 이 순간은 제이크, 카이라, 미카, 그리고 양이 등지고 서있는 햇살 떨어지는 정원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사진의 바깥에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