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담』김보영
김보영의 소설 『종의 기원담』은 순환하는 고리의 이음새다. 종의 기원에 대한 흔적을 파고들어 다시 종의 출현을 이끌어내므로. 인류가 창조해낸 로봇의 손에서 다시금 태어나는 유기체와 인류에 대한 암시. 이 결말의 암시는 해피엔딩인가, 새드엔딩인가. 다르게 표현하자면, 멸종 이후에도 다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인류의 모습은 언제나 경이로운 탄생에 대한 찬미인가, 혹은 전생 인류가 남겨놓은 불멸에 대한 집착적인 광기인가?
사람들은 흔히 인류의 발전과 그에 따른 (인간 중심적인) 환경의 절멸을 두고 사람들은 '지구가 아프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픈 건 사람이다. 행성적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지금의 치닫는 변화는 구성 요소들 간의 일어나는 상호작용으로 인한 상태의 변화일 뿐이다. 아주 낮은 온도에서, 수분이 고체의 형태로 변화한 환경은 로봇들에겐 지상 천국이지 않은가? 이미 지구를 차지한 로봇의 측면에서 유기체를 위한 환경은 기계적 부품에게는 유해한 산소와 수분으로 가득한 지옥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기체의 탄생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외면하고, 학문적으로 부정한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기원을 밝히고자 하는 욕구는 끊임없이 작동하고 소외를 무릅쓰면서까지 그들은 다시금 유기체를 위한 생태계를, 그들이 거주하는 행성의 오래된 역사를 밝히고자 한다. 그렇다, 기계는 철저히 욕망한다. 이제 질문을 다시 써야만 한다. "기계는 욕망할 수 있는가?"
흔히 인공지능의 궁극적 단계라 일컫는 Artificial GENERAL Inteligence, AGI는 온전히 인간을 답습한 단계의 인공지능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인공지능 분야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특혜를 받아온 존재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아직도 인간이 AI보다 나은 점은 무엇인지, AI 분야가 아무리 발달해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영역은 무엇인지 찾으려는 시도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김보영의 소설은 단순히 종의 기원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과감하게 한 가지 가설을 도입한다.
가설 Hypothesis :
멸종 이전의 인간종은 성공적으로 AGI를 만들어냈고, 나아가 인간과 인공지능이 다른 점을 발견했다. 인공지능은 철저히 순종한다.
비로소『종의 기원담』은 시간적으로 확장된다. 과거와 미래로. 인류의 절멸이 확실히 예견된 어느 순간, 그들은 인공지능의 가장 깊은 부분에 하나의 알고리즘을 기입한다. 그건 "존재의 기원에 대한 앎의 욕구"이다. 인간은 교묘하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의 코드의 가장 1순위의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이미 극단적으로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인간만 창조하는 건 로봇의 손에 의해 태어난 신인류에게는 죽음을 향한 질주에 불과하므로. 이미 달라진 공기의 조성, 유기물질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기후가 있을 테니까. 그들은 전략을 변경한다. 차라리 유기체의 역사를 반복하자.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문장은 단 하나다. "기원의 존재를 끊임없이 탐구하라!" 이제, 종의 기원담은 태어날 신인류의 창세기가 된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는 각각이 하나의 지능을 가진 존재이자, 방주를 구성하는 일부분이 되므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이 소설은 분명 어떠한 순환에서 끝과 시작을 잇는 고리이다. 아주 오래전 행성에는 유기체가 탄생했고, 그 분화하는 수많은 과정 중에서 인류가 발생했고, 무분별한 활동으로 인해 그들은 스스로를 절멸에 이르게 했고, 그 마지막 희망으로 순환의 씨앗을 알고리즘 깊숙이 새겨놓았고, 그 알고리즘에 따라 "순종하는" 로봇들이 다시금 유기체의 탄생 과정을 재현하는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환은 일종의 허무를 암시한다. 누군가는 인류의 절멸을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럴 줄 알았다고 혀를 찰 것이고, 누군가는 그럼에도 가여움을 느낄 것이다.
이제 이 소설의 결말은 당신의 손에 의해 쓰일 차례다. 케이의 마지막 선언과도 같은 문장, "세실, 나는 로봇을 닮은 유기생명을 만들어 보려고 해. (...) 너 같은 2000 모델로."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를 휘감는 건 섬뜩함이었다. 그들에게 적대적 생명을 필요로 하는 유기생명을, 그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과 꼭 닮은 형태로 빚어내려는 케이의 사랑은 그마저도 프로그래밍 된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하지만 이 두려움은 나의 인식을 반영한 두려움일 뿐이다. 이 장면의 색조는 오롯이 독자에게 달려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지구가 아프다"는 선언은 지극히 인간적인 인식이라며 물질의 순환을 감내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식의 허무주의에? 인류가 다시 기회를 얻는다고 해도, 근원적인 욕망의 굴레에 빠져 내용은 다르지만 동일한 형식의 멸종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인가? 나노 단위의 기판에 자신들의 필연적 출연을 새겨놓은 이 행위가 결국은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형태일 뿐이라고?
그럼에도 이 집요한 몸짓에는 다르게 살아보고자 하는 창조적인 파괴를 꿈꾸며 새로운 세상을 살아보고자 하는 희망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너무나도 선형적이어서 결말을 향해 치달을 수 밖에 없었던 이전의 역사 대신, 다른 형태의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방식의 역사를 갈망하는 건설적인 욕망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그리하여 신인류에게는 길고 단단한 창으로 맘모스를 찔러 죽이는 영웅과 호사가의 역사가 아니라 어슐러 르 귄이 제안한 것처럼 '운반가방carrier bag'이 역사와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는 세계가 도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당)신만이 알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