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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의 전시

안드로이드는 어떻게 전기곤충의 꿈을 꾸는가?

by 보존과학자 C

<How Does An Android Dream Of Electric Sheep Worm?>

신승엽 개인전 @WWNN



전시의 제목은 자명하게도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의 꿈을 꾸는가? (Does An Android Dream Of Electric Sheep?)에 대한 오마주다. 소설 그 자체보다 완벽해보이는 이 제목은 결국 인공적인 장치로서 안드로이드가 꿈이라는 내면을 가질 수 있는지를 논하며, 나아가 그 꿈이 안드로이드 자신과 유사하게 인공적이고 순종적으로 고안된 장치로서 전자양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지를 질문한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독자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자가 될 수 없다. 안드로이드가 아닌 존재의 대답은 인가받을 수 없으므로. AI 모델의 발전을 거듭해온 개발자들조차, 그들의 모델이 왜 환각(Hallucination)을 일으키는지(혹은 겪는지) 밝혀낼 수 없는 것처럼, 이 질문의 적절한 답변은 결국 블랙박스(Black Box) 안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안드로이드의 설계자임에도 불구하고 블랙박스 바깥에서 서성일 뿐이고, 오직 답변의 권한은 안드로이드에게만 있다. 우리는 안드로이드의 의사 결정 구조에서 철저히 주변적이다. 그럼에도 이 질문은 단순히 무기력한 메아리로 그치지 않는다. 질문에 내포된 무기력함은 그것의 창조자인 유기체로부터 권위를 빼앗고, 모든 사물에 깃든 생명의 존엄성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신승엽 작가는 이 문장을 오마주하며, 대신 문장의 시작과 말미에 수정을 더함으로써 작가 본인이 가진 관심의 지점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문장 앞에 붙은 의문사 "어떻게How"는 그의 대답("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의 꿈을 꾼다.")을 전제하고, 나아가 그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 질문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전시장은 사방이 흰 벽으로 둘러싸인 화이트큐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블랙박스가 되기를 자처한다. 말하자면, 전시장은 (그가 이미 인정한) 인공생명의 매커니즘이 작동하는 블랙박스이며, 실리콘 기판 위 전류가 지나가는 회로이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태도는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탐구하는 연구자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는데, 연구자의 접근법에 따라 본 전시는 생명의 징후로서 환경과 개체 간의 상호작용 매커니즘을 논하는 1층을 거쳐, 실리콘 기반의 물질적 조건 위에서 매커니즘이 구현된 인공생명, 예쁜꼬마선충C.Elegans 작업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신승엽은 작업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를 구조화하듯 의도적으로 작업물을 배치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전시장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실현된 인공생명을 마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본 전시에서 작가 작업의 구체적 형식이기도 한 '예쁜꼬마선충C. Elegans'은 생명 연구에서 지표적인 역할을 한다. 생명주기가 짧고 모든 개체의 세포 배치가 동일하다는 특성으로 기인해 90년대 유전학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되기 시작한 예쁜꼬마선충은 그 덕에 생물학 분야에서 여러 기념비적 족적을 남겨 왔다. 역사상 최초로 한 개체의 모든 유전적 생애가 완전히 기술된 다세포 생물이기도 할 뿐더러, 신경해부학과 커넥톰학, 신경과학을 경유해 2019년에는 <Open Worm> 프로젝트를 통해 알고리즘으로 완전히 기술되기도 했다. 따라서 최초로 실리콘 기판 위에 "이식된" 다세포 생물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는데, 이식된 인공 예쁜꼬마선충이 실제와 동일한 방식의 삶의 양식을 보여줌으로써, '생명'이란 물질적 기반의 문제가 아니라 '패턴'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Open Worm> 프로젝트는 실리콘 기반 생명체의 생명력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다시 말해 '선행하는 생명을 인공적인 방식으로 기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인공생명의 범위를 넓혔다. 이는 '생명'이라는 개념에 대한 일반론적 접근 대신, 생명력 자체를 실현함으로써 '생명'이 갖는 근원적인 존엄을 '삶' 쪽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이미 알고리즘으로 기술이 완료된 생명체를 다시금 이 전시장 내에 호출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냐는 질문이 당연스레 뒤따른다. 오픈 소스로 제작된 인공생명을, 누구에게나 동일성을 보장하는 데이터의 조합에 불과한 예쁜꼬마선충 모델은 왜 이곳에 다시금 등장하게 것인가?

'데이터'라는 재료 그것이 기술되는 방식을 의미할 뿐이다. 문자가 기술되기 위해선 종이와 펜이 필요한 것처럼, 데이터에겐 실리콘 기판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것이 실리콘 기판 위에 새겨지고, 전류가 공급되고, 알고리즘대로 작동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무턱대고 인공생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딕의 소설에서 데커드가 공감empathy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존재론적 의미를 고찰하듯이, 작가는 예쁜꼬마선충 모델이 진짜 인공생명으로 여겨지는 지점을 파고든다.

작가가 1층에서 선제적으로 보여주는 작업들은 '생명'의 지형을 거칠게나마 그린다. 주변 환경과 호혜적으로, 때로는 폐쇄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주는 스키매틱 다이어그램 작업, 어떤 거대한 인공생명체의 일부를 떼어와 그 부위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기전을 연구하는 표본처럼 전시된 키네틱 조형물이 그 결과물이다. 이러한 선행이 없다면 2층의 선충 지향 생명체가 보여주는 경이로운 생명력은 단순한 우연의 결과물에 불과할 것이다.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한 이러한 작업(혹은 연구자료)은 일종의 벤 다이어그램이다. '생명'이라 부를 수 있는 조건들을 탐색하고, 원을 교차해 그려나감으로써 최종적으로 그 조건들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생명'을 이끌어내려는 시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2층의 작업들을 마주한다면, 해당 작업들은 교집합의 구체적 실현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작가의 의도대로 관객이 가장 마지막에 마주하게 되는 작업은, <객관적 시뮬레이션에 물리적으로 렌더링된 선충 지향 생명체>이다. 이 작업은 네이밍에서 보여지듯, 단순히 인공생명을 재현하는 행위와 단호히 선을 긋는다. 이 선충 지향 생명체의 재료는 예쁜꼬마선충 모델이지만, "물리적으로 렌더링"되는 과정을 통해 무한한 복제체에서 개체적 특성을 획득한다. 99% 이상의 동일성을 갖는 일란성 쌍둥이가 성장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존재로 자라듯, DNA로 비유될 수 있는 예쁜꼬마선충 모델의 데이터는 물리적 렌더링되는 순간, 그것이 구현되는 환경의 성분을 자신의 일부로 흡수하고 새로운 자신만의 엔트로피적 질서를 획득한다. 1층부터 축적되어온 전시의 다른 작업들이 인공생명의 '부분'을 설명한다면, 이 작업에서는 부분의 총합을 훌쩍 넘어서고, '창발'한다. 창발성은, 생명의 분명한 징후이다.

인공생명 연구는 기존의 유기생명체가 갖는 특성과 그에 대한 부분적인 지식에 의탁한다. 하지만 이 부분적인 지식들로 벤다이어그램을 다시금 그려나가면,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실재하지 않지만, 실현 가능한) 생명체와 필연적으로 마주친다. 작가의 작업은 공리로부터 참인 명제를 도출해나가는 연역의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참이라고 알려진 명제로부터 역산이 가능한 새로운 공리의 체계를 발굴해나가는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역산의 과정은 작가에 손에서 비로소 하나의 형태로 빚어지고,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난다. 꿈틀대며 역동하는 선충 지향 생명체 앞에서, 내가 그랬듯 당신도 생명의 경의를 목도한 것처럼 말문이 막힐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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