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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없이 먹는 삼겹살은 맛이 없다

1. 청춘의 맛 <냉동삼겹살> 편

by 언씨

삼겹살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있으면 먹고. 아니면 말고. 의 그저 그런 호불호의 영역에 속했던 삼겹살이

없어서 못 먹는 만큼 좋아지게 된 계기는 내가 소주를 본격적으로 좋아하던 시점과 거의 겹친다.


지금은 어떻게 그랬는지 까마득히 생각도 안나는 맥주광인 시절 (1700ml 생맥주를 혼자 두 개를 격파했던 레전드 방광부자 시절이 있었다) 나는 강경 소주파 친구들을 보며 저 쓴 걸 왜 먹나? 싶었다.


몇 번의 인생 고난을 겪으면 소주가 매우 달아질 것이다...라는 꼰대(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들에게도 코웃음을 흥 쳐가며 나의 맥주 사랑병은 고질병이라 죽어도 낫지 않을 것이고 소주파로 갈아타는 변절자적인 짓은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으리라 자부했었다.


나의 맥주사랑병이 얼마나 중증이었냐면, 대학 시절 학교 앞 소문난 생맥주 맛집에서 단골손님으로는 성이 안 차 직접 1년 간 알바를 자처했었고, 내가 살던 자취방 1층에 위치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내가 맥주를 사지 않는 날이면 오늘은 왜 맥주를 안 사세요?라고 묻기도 했었다.


그랬던 내가 정말 그들이 말했던 것처럼 소주가 달아지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 급변의 날은 봄바람 같이 하루 만에 찾아왔고, 나는 소주의 단맛에 대해 눈뜨고 말았는데

소주가 처음으로 달았던 바로 그날의 안주가 삼겹살이었다.




1. 취준생의 마음을 녹인 냉삼의 정석, 부산대 <청춘삼겹>


소위 고깃집의 '고급화'가 대중들에게 익숙해진 현재의 시점에서도, 누군가 나에게 두꺼운 숙성삼겹살과 얇디얇은 냉동삼겹살 딱 두 가지의 옵션 중 단 하나만 택 1 하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냉삼을 택할 것이다. 그렇다고 두꺼운 삼겹을 싫어하냐? 하면 절대 아니다. 호와 극호 중 극호를 택한 것 일뿐인데, 극호의 범주에 냉삼을 집어넣을 만큼 나는 언제부턴가 냉동삼겹살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번 <삼겹살> 편에서는 특별히 냉동삼겹살로 주제를 세분화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뚱삼과 냉삼 두 영역을 다 이야기한다면 분량 조절에 실패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포문을 열어준 식당이 부산 금정구 1호선 부산대역 앞에 위치한 청춘삼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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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것 없다. 누군가에게 냉동삼겹살을 떠올려봐라 하면 바로 생각날 그 이미지의 정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비주얼을 자랑한다.


특별할 것 없는 이 집은 내가 한창 취업준비를 할 시기인 4-5년 전 처음 방문했다. 당시만 해도 웨이팅이 일반적이지 않은 부산대 상권에서 이 집은 가벼운 웨이팅을 하게끔 만드는 몇 안 되는 집이었다. 갈 때마다 가족단위의 손님들이 많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3년 전 가격표 기준 국내산 100g 6,900원의 가격을 자랑했다. 1인분 보다 조금 많은 200g의 가격이 만사천 원이 채 안 되는 걸 감안했을 때 미친 인플레이션의 한국 물가 대비 매우 저렴하게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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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에서 추가 점수 1점, 밑반찬 세팅에서 추가 점수 3점이다.

냉삼의 매력은 보통 삼겹살과 함께 하는 밑반찬들을 모조리 구워 함께 먹는 비빔밥 스타일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집은 기본적인 파절이, 김치, 마늘 베이스에 고사리와 마늘종까지 함께 제공한다. 투박하지만 맛있는 파절이에 얇은 삼겹살을 올리고 이 모든 것들을 한 쌈에 싸 먹노라면 소주 한 병이 30분 만에 없어지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청춘삼겹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의 나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반복되는 면접의 고배, 인생 처음 느껴보는 무소속감에서 오는 두려움,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뼈저린 객관화과정에서 온 현타가 합쳐져 하루에도 수십 번은 무력감을 느꼈고 특히 그중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놈이었던 금전 압박의 스트레스는 수많은 밤을 눈물짓게 했었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그 네거티브한 감정의 집합체들을 '청춘의 특권'이라 명명하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도 그 밑바닥 감정을 '특권'이라는 단어로의 억지 긍정치환은 책임져줄 수 없는 남일에 대한 악랄한 프레임이자 모두가 한 번쯤은 걸어온 길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미화라고도 생각이 들었더랬다.


매일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으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도전과 소신 지원의 두 갈래길 사이에서 우리 연극동아리 선배님은 나에게 '소고기로 배 채울 수 있는데 당장 배고프다고 삼겹살을 선택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한 치앞도 보기 힘든 절박한 취업준비생이었던 나에게는 삼겹살 중에서도 가장 접근하기 쉽고 어떻게 보면 가장 토속적인 냉동삼겹살이 제일 맛있게 느껴졌었다.


글자 그대로 정말로 '어찌할 수 없는' 청춘의 여러 갈림길 속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과 본연에 충실한 맛으로 내 지갑사정을 헤아려 줄뿐더러, 기름기 많은 음식이 소주를 이렇게 달게 만드는구나를 처음 무릎을 탁 치고 알게 해 주었던 음식. 식당 이름도 우연찮게 청춘삼겹인 청춘의 냉동삼겹살이었다.


취업에 성공하여 상경한 후에도 부산대에는 몇 번 방문했지만 아쉽게도 청춘삼겹을 재방문한 일은 없었다.

이유는 명확하진 않지만, 굳이 서술하자면 장소를 떠올리면 그때의 감정이 가장 먼저 뒤따라오는 내 성격상 청춘삼겹은 개인적으로 많이 위로를 받은 공간이기도 했지만 모종의 개인적인 우울함도 무조건적으로 연상되는 공간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나의 개인적 이유를 차치하고 <청춘삼겹>은 맛과 구성에 있어서는 실패하지 않는 선택이 될 것임으로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2. 아니 이렇게 맛있는 냉삼이 존재하다니, <잠수교집>


좋아하는 안주가 뭐예요? 물어봤을 때 고기요! 그중에서도 냉삼이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나였어도 냉삼의 맛은 거기서 거기 아닌가?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었다.


그게 얼마나 건방진 생각인가를 알려준 냉삼 맛의 탑티어가 바로 잠수교집이다.

처음 상경한 날 이사를 마치고 식도에 가득 낀 먼지를 씻어 내리기 위해 고민 끝에 선택했던 메뉴이자 식당이었다. 대학 시절 서울에 놀러 갔던 모 친구가 서울에서 뭐가 제일 맛있었냔 질문에 잠수교집이 최고였단 답변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어 근처 맛집을 검색하자마자 운명처럼 지도에서 다시 마주한 이름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방문했던 지점은 잠수교집 <문래직영점>이고, 워크인으로 방문했었기 때문에 30분 정도 웨이팅 했다.

넓지 않은 매장에 연기는 자욱하고, 좁은 테이블 간격과 많은 직원들 때문에 어수선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메뉴층만은 그 어떤 고깃집보다 매우 탄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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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상차림을 보면 익숙지 않은 것들이 눈에 띄는데, 이 집의 킥인 무생채와 계란노른자 소스다.

몇 번의 장염을 겪은 바 있고 위가 약한 나는 익히지 않은 음식에 대해서는 호불호를 떠나서 자동적으로 일종의 거부감이 드는데, 이 노른자 소스는 거짓말이 아니라 삼겹살을 찍어먹으면 기가 막힌다.

고기자체의 신선함 때문에 씹었을 때 서걱한 식감이 아닌 탱글탱글한 육즙을 느낄 수 있고, 살코기 부분과 비계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데 이를 계란노른자 소스에 찍어 곁들이들과 함께 먹으면 감칠맛이 입안에서 폭발해 버린다.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은 후, 쓴 맛을 느끼기도 전에 고기쌈을 먹게 되면 둘의 조화가 얼마나 환상적인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기본으로 제공되는 두툼한 계란말이를 함께 구워 쌈에 싸 먹으면 왠지 모르게 소주가 매우 매우 달게 느껴지는데, 그렇다고 여기서 이것저것 생각 없이 집어넣다가 폭식해 버리는 실수를 범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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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먹고 나서 후식에는 약간 힘을 뺀 다른 집과는 달리 후식 메뉴들이 한 덩치 하는 친구들이기 때문에 페이스를 조절해서 먹지 않으면 순두부찌개나 청국장을 먹을 때 생각보다 크기가 작은 자신의 위를 탓하며 한탄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특히 이 집 순두부찌개는 깔끔함과는 거리가 먼, 아주 걸쭉한 스타일에 건더기 반 국물 반, 아니 건더기가 좀 더 많은 느낌의 찌개인데, 그렇기에 포만감을 더 느낄 수 있고 씹는 재미가 있으므로 지루할 틈 없이 무한으로 소주를 시키게 되는 느낌인 것이다. 그냥 모든 메뉴가 맛있다. (진지함)


문래점 첫 방문 후, 이후에도 종종 방문했는데 친분이 두터운 대학 언니 커플이 상경했을 때 소주안주로 냉삼을 픽해 해방촌에 위치한 <잠수교집 본점>을 방문했었고 4인이 소주 7-8병 정도 격파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나는 비록 남자는 아니지만... 내가 남자였다면 충분히 불x친구로 불렀을법한 친구 J양과 S양이 상경했을 당시에도 <잠수교집 압구정직영점>을 방문했더랬다. 이 집이 얼마나 아저씨 취향저격 맛집이냐면, 입이 짧디 짧은 소식좌 J양이 상경하여 깨작거리지 않고 코를 박고 먹은 유일한 음식이었다. 그녀는 배를 팡팡 두드리며 본인의 아버지께 이 맛을 보여드리고자 서울에 모셔오겠다 선언했다. 압구정점을 방문한 전 날 우리는 이미 소주를 과다 복용한 상태여서 속이 말이 아닌 상태였지만, 어쩔 수 없이 폭력적인 맛의 향연에 소주 각 1병씩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소주와 잘 어울리는 메뉴들이 많은 잠수교집을 재방문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 언급된 두 식당 외에도 이태원 <나리의 집>, 합정 <천이오겹살>, 당산 <번양집> 등을 추천한다. 지금은 한창 유행이었던 시기에 비해 냉삼 열풍이 한층 사그라든 것은 맞지만, 그만큼 예전에 비해 웨이팅 시간도 줄었다는 뜻이므로 근처에 위치한다면 실패 없을 맛집이니 소주와 함께라면 더욱 금상첨화인 냉동삼겹살을 오늘의 반주메뉴로 고른다면 후회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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