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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을지로의 노포들

2. <을지로 소주 맛집>편

by 언씨

경상도 출신인 서울 까막눈이었던 나에게 을지로는 심적으로 가장 친근한 동네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첫 연재작을 읽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이유는 상경 후 첫 직장이 을지로에 소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을지로3가역에서 나와 처음 을지로를 마주했던 순간은 마치 사진 한 컷이 촬영된 것 마냥 뇌리에 똑똑히 박혀있다. 높은 회사 건물들, 바삐 움직이는 표정없는 회사원들, 그 사이에 위치한 허름한 가게들, 어딘가 어수선한 거리.


우리나라 수도 서울을 누군가에게 한 장면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을지로의 한 장면을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다양한 삶의 모습과 모든 연령층이 함께 공존하는 양면적인 동네.

정렬되지 않은 비정형의 형태 속에서도 그 나름의 질서가 있는 을지로가 썩 싫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나의 '아저씨 취향'을 빼놓을 수 없다.


언제 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샹들리에가 있고 입구에 큰 거울이 떡하니 있는, MZ핫플 인스타 광고에서 나올 법한 술집을 나는 잘 가지 않는다. 잘이 아니라 거의 안간다. 20대 초반에 친구들을 따라 몇 번 가본적은 있으나, 예쁜 접시에 작은포션으로 서브되는 휘황찬란한 영어단어가 섞여 명명된 그런 안주류에게 나는 관심이 없다. 비하나 폄하는 절대 아니지만, 그런류의 안주들은 대개 감동을 주지 않는다 (매우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예를 들자면, 스페셜1++코리안비프타르타르라고 불리며 다양한 곁들이와 소스종류들과 함께 간장종지 양만큼 나오는 35,000원 짜리 메뉴보다, 허름한 가게에 더도 덜도 말고 '육회 200g'이라고 궁서체로 적혀있는 본연에 충실한 메뉴가 내 심금을 울린다.


메뉴뿐만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 상 다른 주종보다 특히 '소주'를 마실 때는 시끌시끌한 분위기에서 소주 자체의 맛이 더 달게 느껴지는 것 같고, 또 서민 주류라는 깊게 뿌리박힌 인식이 있어서인지 환경이 조금 지저분하더라도 뭐 어때~ 하며 빡빡하지 않은 여유로운 마인드가 구태여 노력하지 않음에도 장착되는 것도 좋다. 이런 나의 취향은 내 인생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심지어는 남자친구와 사귀기 전 두번째 만남 때 팬시한 파스타를 먹고서는 영 마음이 열리지 않아 2차로 생태탕집을 갔었더랬다 (무려 오후 세시 경이었다). 소개팅 후 첫 애프터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을 법한 메뉴인 생태탕에 소주 한 잔을 하며 나는 그에게 마음을 열었고, 우리는 만나게 됐다 (물론 생태탕 때문만으로 그와 사귀게 된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나에게 소주와 노포는 나의 마음을 말랑하게 하는 어떤 요소가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 나를 잘 아는 내 지인들은 너는 전생에 무조건 경상도 아저씨 였을 거라며 20대 여자 중에 멸치볶음에 소주 먹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것이라고 종종 놀린다. 그런 조롱아닌 조롱이 싫지 않고 언젠가부터 '아저씨'는 나를 대표하는 키워드가 되었는데, 이 '아저씨 취향'은 상경 후 을지로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 이 거 안먹으면 을지로 방문은 말짱 도루묵입니다 <본가을지오뎅도루묵>


을지오뎅은 을지로3가역에서 내 첫번째 회사가 위치한 곳까지 걸어가는 길목에 있다. 허름한 간판, 더 허름한 내부였지만, 6시 퇴근 후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항상 늘어져있는 줄을 보고선 '아 이집 맛집인가보다'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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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버시라고는 없다. 모르는 사람들과 마주보며 중앙에 위치한 오뎅 국물을 쉐어하고, 이모님 소주 한병이요! 외치고 나선 내가 앉은 자리까지 손이 닿이지 않는 연유로 옆과 앞에 앉은 사람이 건네 건네 주는 소주를 받아야한다. 차갑게 얼어붙은 동네, 서울에서 이 얼마나 정겨운 광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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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준 메뉴는 고정이다. 일단 이 집은 도루묵구이이다. 나는 바다 동네에서 자랐지만 도루묵은 이 집에서 처음 접했다. 머나먼 과거, 조선 시절 한양이 수복된 후 궁으로 돌아온 선조가 이 생선을 먹어 보고선 맛이 너무 없다며 “도로 묵이라고 하라”고 해서 도루묵이라는데, 선조의 입맛에 반기를 들고 싶을 만큼 알이 꽉찬 도루묵을 한입 먹노라면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후들후들하고 부드러운 살을 가진 여타 흰살 생선과는 달리, 도루묵은 쫄깃 쫀득하다. 그리고 적당히 구워져 불맛이 입혀진 껍질은 고소한 감칠맛의 극한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스가 가득히 묻혀져 화려한 음식보단 재료 본연의 맛이 느껴지는 음식들과 소주의 궁합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소주를 우선 원샷하여 목을 적시고, 뒤이어 바로 도루묵 한 입을 씹다보면 향긋한 이 생선의 기교 없는 맛이 소주의 맛을 적당히 해치지 않아 서로의 풍미를 더 살려준다.


안타깝게도 이 집은 이른 저녁부터 항상 만석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2차를 즐길 적절한 타이밍에 웨이팅 없이 적절한 흥을 유지하며 바로 입장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므로... 1차의 흥이 다 깨져버리기 전에 과감하게 웨이팅을 포기하고 아예 오후에 슬쩍 낮술하러 가는 것을 추천한다. 개인적인 경험상 주말 4시경 방문했을 때는 웨이팅이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만석이었다) 본격적인 술 자리로 이동하기 전 소소하게 소맥 한 잔을 위한 애피타이저 알코올 장소로 적격이었다. 미처 해가 지지 않은 늦은 토요일 오후에 뜨끈한 어묵 국물과 도루묵 한 점, 그리고 소맥 한 잔으로 시동을 건다면, 주중의 스트레스를 완전히 격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날 주량 컨디션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2. 이모님들 닭무침 밀키트 판매해주시면 안될까요 <황평집>


이 집 간판엔 닭곰탕이라고 쓰여 있지만, 이 집의 주력메뉴는 닭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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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무침이라는 음식은 처음 접했다. 보통 내가 아는 '무침' 종류는 골뱅이라던지 도토리묵이라던지, 쉽게 말해 차게 조리했을 때 맛이 배가 되는 음식을 조리할 때 쓰이는 조리기법이다. 보통 삶든 튀기든 굽든 따뜻하게 요리해서 먹는 재료인 닭을 삶아 일부러 식힌 뒤 각종 야채와 비법소스로 버무린다. 이게 무슨 음식인가 싶겠지만 나에게 이 집 닭무침은 단백질은 되도록 따뜻하게 먹어야 맛있다는 내 편견을 깨준 음식이다. 야들야들한 닭 안심살과 군데 군데 붙어있는 닭껍질, 그리고 큼지막하게 썰린 오이를 함께 씹노라면, 보통 소주 안주 하면 생각나는 뜨끈하고 얼큰한 이미지의 프로토타입에서 벗어나, 새콤 달콤하지만 또 고소한 새로운 맛의 지평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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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생각보다 넓은 편이라 약간의 웨이팅이 있어도 쉽게 빠지는 편이다. 왁자지껄한 내부는 살짝 취기가 오른 2차 무드로 적격이고 둘이나 셋이서 방문했다면 닭무침 하나와 닭곰탕 하나를 주문해 나눠 먹는 것을 추천한다. 닭곰탕은 매우 맑은 느낌인데, 다진마늘을 듬뿍 떠 넣고 후추를 뿌려 닭곰탕과 먹는다면 음주와 해장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무적의 하이브리드 안주가 된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빠른 마감시간인데, 친한 회사 동기들과 2차로 갔을 때 생각보다 마감이 빨라 허겁지겁 안주를 술을 욱여넣느라 혼이 났고, 이모님들의 은근~한 퇴근 압박에 헐레벌떡 나온 기억이 있으므로 여유롭게 즐기고 싶다면 넉넉한 시간대에 방문해 보도록 하자.



3. 시경오빠 저도 이 집 좋아해요 <이남장>

9x년생인 나도 삼촌이나 아저씨라고 부르기 싫은... 잘자요 오라버니 시경이 오빠도 추천한 그 집.

을지로3가역에서 만선호프 방면으로 가기 전, 왼쪽으로 쭉 가다보면 후미진 골목 속에 위치해 있는 바로 설렁탕 맛집 <이남장>이다.


이 집을 논하자면 또 나의 아픈 과거인 폐업한... 전 회사가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당시에 자칭 '맛잘알'이었던 우리 팀 팀장님이 첫 출근 날 을지로 맛집을 소개시켜주겠다며 데려간 집이다. 당시 팀장님은 40대 중후반 '아저씨'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 추천 맛집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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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토종 한국인답게 부추속 야채를 좋아한다. 보통 매운 맛이 나는 대파, 양파, 쪽파 등을 부추 속 야채로 분류하는데, 소주를 좋아한다면 이런 알싸한 파류 야채를 싫어하긴 어렵다. 이남장의 설렁탕은 하야디 못해 뽀얗게 고와져 있는 국물에 대강 썰린듯한 두툼한 고기가 양껏 들어가있다. 보통 이렇게 많은 양의 고기가 투박하게 많이 들어있는 설렁탕은 조금 꼬릿꼬릿하거나 특유의 고기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이 집 설렁탕은 그런 비릿함이 아예 없는 순수한 깔끔한 맛이다. 그 깔끔한 토렴식 국물에 기본으로 제공되는 대파를 와르르 쏟아 밥 말아먹으면 뽀얀 국물에서는 쉽게 느끼지 못하는 시원함까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같이 주는 녹진한 김치까지 얹어먹으면 그날 집에 안가도 된다.


출근 첫 날 얼어있는 신입사원 모드였던 나였지만, 그 와중에도 '이건 점심메뉴가 아니라 소주 안준데...' 라고 속으로 혼자 생각하게 되었더랬다.

그래서 어느날 등산을 마친 저녁에 재방문을 했고, 옆자리 아저씨들 술자리에 놓여있는 수육 비주얼을 보고 어딘가에 홀린듯이 자연스럽게 설렁탕 한 그릇에 모듬 수육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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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수육도 잘한다. 조금의 퍽퍽함도 없는 약간의 내장이 섞인 야들야들한 수육인데, 밥 반찬이라기 보단 소주와 완벽 궁합을 이루는 술안주에 가깝다. 부속부위를 좋아하지 않는 친구는 쏘쏘라고 평가했지만, 퍽퍽한 식감보다 부드럽고 쫄깃한 고기의 식감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극호에 가까운 형태의 고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뭉텅뭉텅 썰어주시는 고기와 부드러운 뽀얀 국물은 소주 치트키로서 단백질과 국물 조합으로 술 먹기를 가장 좋아하는 나에게는 2차 갈 필요가 없는 메뉴이다. 나와 비슷한 입맛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빠른 시간 안에 와르르 술을 마셔야 하는 위기에 처했다면 나는 주저 하지 않고 반주, 1차, 2차를 통합하여 한큐에 즐길 수 있는 이남장을 추천한다.


IMG_0553.jpg 이남장 한상




번외! 분량조절에 실패하여 아쉽게도 본문에 오르진 못했지만 아래 네 곳도 강추를 드리는 바입니다.


1) 노포는 아니지만 을지로 이자카야 <라스베가스>

- 만취한 적이 만취하지 않은 적보다 많은 손에 꼽히는 2차 제격 이자카야, 모든 메뉴 평균 이상, 분위기 평균 이상, 썸탈때 가면 좋을 곳


2) 말해뭐해 유재석 순대국밥 <청와옥>

- 극강의 웨이팅만 이겨낼 수 있다면 추천하고픈 순대국밥의 정석, 냄새 안남, 순대 맛있음, 편백정식 솥밥도 맛있음


3) 미친 비주얼의 모듬 순대 <산수갑산>

- 점심 때 밖에 방문하지 못해서 소주를 시킬 수 없어 급 반차를 갈기고 싶었던 순대국밥집, 최자로드 맛집, 주변에 아저씨들 밖에 없으면 찐맛집이라는데 여기는 점심때도 주변에 아저씨들이 다 소주 먹고 있음.


4) 굴짬뽕 1등 <안동장>

- 한국 굴짬뽕 원조라는데 원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맛은 먹어본 굴짬뽕 중에 최고, 국물은 미친 시원함, 면발은 미친 쫄깃탱탱함, 노포 중국집 답게 노포 스타일 탕수육도 바삭바삭 맛있다고 하는데 여기도 아쉽게 점심 때 밖에 방문하지 못해서 겨울에 재방문 예정, 소주보단 연태를 페어하는 것이 옳은 선택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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