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관찰일기

시어머니와의 첫만남

by 심효진

시어머니를 처음 만난 건 지금의 남편과 사귀기 시작한지 한달이 조금 넘어서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붐비는 강남신세계백화점 10층 식당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황지우 님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실사판을 찍고 있었다.

어머니가 오시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기다리는 동안
올라오는 모든 아줌마들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쇼핑백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어머니가 오시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모든 사람이
어머니였다가
어머니였다가, 어머니일 것이었다가
다른 아줌마들만 내린다
사랑하는 남자친구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갈 뻔 했다
식당가에서 나는 똥줄이 바짝 타들어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쇼핑하고 있다
아랫층에서 지금도 부지런히 엄카를 탕진하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타고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아줌마들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를 욕하고 있다.

드디어 짧은 몸뚱이가 쇼핑백을 가득 들고 옆에 어머니를 대동한 채 나타났다.
입가에 웃음이 만연하다.

알밥을 시켜 콧구멍으로 넣으며 어머니와 마주보았다.
남자친구와 꼭 닮은 도톰한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예비 시어머니- 뿅뿅이 여자친구를 이렇게 만나보는 건 처음이에요. 참 반갑고 기쁘네요.

박꽃같이 웃으셨다.
따뜻한 실오라기가 마음에 피어났다.






이제 이일 저일 겪으며 단단한 가족이 되어버린 나의 시어머니는 나와의 첫만남을 했던 날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신다.


"그 날 아들 여자친구를 만나서 가는데 서울에 가는 KTX에서 창 밖에 하얗게 눈이 내리는거야. 그래서 아들에게 좋은 사람이 생긴거구나 싶었단다."







결혼 전에 둘다 자취를 했던 터라 신혼집에 처음 입주했을 때
양쪽 짐이 합쳐지면서 방바닥이 안보일만큼 엔트로피가 무한대로 발산했다.

남편이 출근하고나면 전후 복구작업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짐을 정리하곤 했는데
하필이면 그 날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낡은 플라스틱 서랍장에 무심히 담겨있는 각종 편지와 사진들.
남편은 정이 많은 타입이라 타인에게서 받은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었다.

아니 이런 횡재가

미니 앨범을 발견했다.
남편의 군인 시절 사진들과 그당시 사귀었던 여자친구 사진이 함께 들어있었다.
그래 그 시절 남편은 이렇게 알콩달콩 귀여운 연애를 했구나.

우유에 막 적신 카스테라 같은 몰캉한 감성으로 한장한장 넘기는데
마지막장에 다다랐을 때

초가 꽂힌 생일 케잌을 앞에둔 어머니는 여자친구와 남편 사이에 오롯히 앉아 계셨다.
그 박꽃 같은 미소를 띄고..

Aㅏ, 어머니..





우리는 만난지 육개월만에 결혼했다.

분명 남편은 시부모님께서 나를 정말 반기고 있고 결혼을 엄청 서두르고 싶어하신다고 했다.

그런데 결혼하고 1년여쯤 지났을까 시어머니께서 불현듯 예전 이야기를 꺼내셨다.


"이제 겨우 여자친구라고 소개받았는데 얘가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결혼을 서둘러달라고 하더라고."







이생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