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관찰일기

결혼의 조건

결혼할 남자와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나보고 싶었다.

by 심효진

버석거리는 눈을 밟고 한발한발 떼보아도 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테헤란로의 고층빌딩 사이로 불어대는 칼바람은 한치의 배려도 없이 매섭게 싸다구를 갈겼다.
엉덩이는 얼어붙어 그대로 썰어버린다해도 알아챌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본 남자는 얇은 검정 코트에 양복바지, 게다가 가죽로퍼를 신고 있어 그의 발에는 이미 감각이 있을리 만무했다.





몇해 전 겨울, 남자의 퇴근 후 함께 무얼할까 하다가 강남역에 가서 심야영화를 보기로 하였다.
집앞 커피숍도 자동차 끌고가기를 즐기는 남자가 걷는 즐거움도 좀 깨닫길 바라는 마음에 강남역에 걸어가자고 졸랐다.

남자- 뭐? 어제 폭설도 내렸는데 어떻게 걸어가. 미끄럽고 위험해.
나- 그래도 강남역은 차도 너무 많고 주차하기도 힘들잖아. 그럼 버스타고 갈까?

남자는 마지못해 승낙하였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강남역CGV로 향했다.
그 날 어떤 영화를 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거리로 나오니 새벽 2시가 훌쩍 넘었다.

나- 헉 이 영화가 이렇게 긴거였나. 두시간반이 훨씬 넘네. 버스도 다 끊긴 것 같아. 어쩌지.
남자- 택시타고 가야겠다. 역시 사람은 자동차가 있어야해.

할증시간대의 강남역주변은 택시 운전수가 甲 오브 甲인 것을 순진했던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 수원이요, 수원가시는 분"
" 아가씨, 분당 안가요?"
어쩐지 모두 목적지를 정하고 있었다.
꼴랑 지하철로 두정거장 거리를 가줄 맘좋은 아저씨는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카카오택시라도 불렀겠건만 불과 몇년 전엔 그런 시스템조차 없었다.

나- 으.. 어..어쩌지?
남자- 걸어야지 모. 역시 사람은 자동차가 있어야해.

차를 두고 가자고 우겼던 것이 내심 미안했다.
우선 진행 방향으로 걸으면서 지나가는 택시가 있으면 잡아보기로 마음먹고 걷기 시작했다.
마침 택시 하나가 지나갔다.

나- 아저씨, 선릉역 가요?

오 왠일. 아저씨는 태워줄듯 정지했다. 안에는 남자 둘이 타고 있었다.
합승은 불법이지만 내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리랴.

나- 오빠! 택시 잡았어. 어여 와.

남자 일행이 있다는 걸 알자 택시는 그대로 떠나버렸다.

나- 헐
남자- 남자는 나가 뒈져야돼. 서러워서 살긋나. 더러운 세상. 역시 사람은 자동차가 있어야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체념한 채 터덜터덜 경사진 테헤란로를 걷기 시작했다.
역삼역이 절반쯤 왔을까.
어그부츠를 신은 발끝이 시려오기 시작했다.
그것보다도 아배크롬비 요가 팬츠하나 덜렁 입은 터라 엉덩이가 정말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액체질소를 엉덩이에 대고 쏘면 이런 느낌일까.

나- 오..오빠 엉덩이가 너무 시려워. 흑흑
남자- 난 발이 잘려버린 것 같아. 감각이 없어.

말 없이 걸었다.
군데군데 눈이 얼어있어 미끄러지지 않도록 온신경을 곤두세웠다.

휘이이이이

빌딩사이로 칼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볼떼기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역삼역이 보인다.
반 왔다. 앞으로 온만큼 더 걸어야한다.

남자- 근데 뿅뿅아. 히말라야 굳이 안가도 되지 않을까?

그 와중에 웃음이 났다.
나는 그동안 결혼할 상대라면 함께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며
극한의 상황에서 서로의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었다.
다른데 갈 필요가 없다. 그곳이 도심의 히말라야 였다.

신나게 웃어제껴보아도 야속한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남자- 나는 히말라야가 여기보다 더 춥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힝 많이 춥지? 오빤 양복이라 더 그렇겠다.
남자- 난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 이래도 자동차가 싫어?
나- 자동차는 사랑입니다. 암요. 그 것은 축복이지요.

내가 살던 곳에 도착하자마자 따듯한 물을 대야에 담아 남자의 발을 담가주었다.
남자는 발이 얼어붙어 물에 담그는 것조차 너무 아프다고 했다.

다음 날, 남자의 구두를 보니 절반 정도가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눈위에 뿌려놓은 염화칼슘 때문인 듯 했다.
미안한 마음에 구두약으로 불나게 닦았지만 이미 염화칼슘에 팅팅불어버린 구두는 이전의 간지는 온데간데 없었다.
남자의 구두 중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던 녀석이라 더 마음이 아팠다.
이후 나는 남자가 차 타고 가자고 하면 군말없이 조수석에 올라타는 착한 어린이가 되었다.


남편의 회사는 전형적인 남초회사에 여자라고는 부서에 서무여직원 한 명 뿐이다.
비록 내일 회사가 멸망할지라도 오늘 술 한 잔에 고기 한 점을 씹고야마는 부서 분위기는
당연히 하드코어하게 잦은 회식을 즐긴다.
연애시절도 다르지 않았다.

연애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남자는 회식이 있다고 했고 오늘은 좀 많이 마실 분위기라 했다.
신경쓰지 말고 먼저 자라는 말에 그 날은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퇴근 후, 간단히 집청소를 하고 샤워를 하고 이것저것 좀 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쾅쾅쾅쾅


어라? 이 시간에 누구지?

나- 누구세요?
남자- 뿅뿅아 나..나야

읭? 남자였다.
황급히 문을 열자 남자는 현관으로 고꾸라졌다.
남자의 이런 모습을 처음 봐 당황스러웠다. - 그 때 우리는 키스도 제대로 안해봤었던 거 같음. 키스는 했었나. 여튼 아직 어색한 사이-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는 나로서는 얼마나 마시면 이렇게 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남자- 미..미안해. 나 너무 많이 마셔서. 뿅뿅이네 집이 가까워서 일단 여기로 왔어.

평소 열이 많은 남자인데 술 때문인지 춥다면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옷들중 사이즈가 좀 넉넉한 것을 내주었다.
겨우 갈아입은 남자는 괴로운지 벽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남자- 으억허어어헉 끄어억 꺽 으허억

짐승의 소리를 내었다.

한참을 박아대던 남자는 침대 위로 쓰러졌고 다시 개떨듯 떨었다.
남자가 안쓰러워 나의 데일리 아이템 수면양말을 황급히 신겼다.
남자는 밤새 몇번인가 토를 하고 몇번인가 머리를 박고 몇번인가 짐승의 소리를 내고 다음날 출근했다.
몇번인가 잠꼬대처럼 미안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남편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 난 그 때 태어나서 수면양말이란 걸 처음 신어봤거든.
근데 정말 그 감촉이 너무 보드랍고 따뜻하더라고.
그 정신에도 정말 이 여자랑 꼭 결혼해야겠구나 싶었어."

매거진의 이전글그 남자의 속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