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집이 많은데 내가 살 집은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문득 그럴 때가 있다.
지금 내가 누워있는 이 곳이 내 집이구나.
부모님과 사는 집이 아니라 내 남편이라는 사람과 살고 있구나.
맑은 햇살이 발끝까지 드는 날에는 더욱 그렇다.
강남 테헤란로 어귀의 회사와 술집이 밀집했던 곳에 있던 오밤중에도 취객들이 거닐던 길목의 자취방과 사뭇 다르게
초등학교 벨소리와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리는 생활감 가득한 이 풍경이 새삼 결혼했음을 실감케 한다.
지금의 신혼집을 결정하기까지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남자와 만난지 두달만에 상견례를 치르고 본격적인 결혼 준비에 들어가기에 앞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남자는 로맨틱코미디 마냥 알아본 집을 나에게 쨘 하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같다.
한동안 매일 퇴근 후에 혼자 집을 보러다니다가 10시, 11시나 되어서야 귀가하곤 했는데
내가 실망할까봐 얘기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상상이상으로 높은 서울의 전세값에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여자친구와 나눠서 보러다니지 그러냐는 친구의 조언에도
집이 너무 좋은데 예산보다 비싸면 안타까워 할거고
예산에 맞는데 집이 상태가 안좋으면 더 실망할까봐
최대한 혼자 알아보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던 남자의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변해가고 이마의 M자 라인은 깊어져만 갔다.
마침내 "뿅뿅이도 집 한 번 보러갈래?" 라고 제안했고 흔쾌히 응했다.
처음 보았던 남자 직장 근처의 신축 대단지 아파트는 관리비가 한달에 5만원이라는 메리트가 있었지만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17평이 아니라 7평처럼 느껴지는 가슴이 탁 막히는 구조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두번째로 보러간 남자가 살던 오피스텔 근처의 주상복합 아파트는 가격대비 작은 평수였지만
나름 깨끗하고 나오자마자 지하철에 연결되어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세번째로 보았던 교회 근처 주택가의 집은 평수는 가장 넚었지만
거실 창문의 절반 가량이 옆집 기와로 가려져 햇빛이 잘 들지 않았고 그 가깝기가 옆집과 악수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남자와 며칠간의 고민끝에 그래도 깨끗하고 교통 좋은 것이 낫겠다며
부동산에 연락했지만 그 집은 나온 그 날 바로 계약되었다고 했다.
한 달 가까이 집이 구해지지 않자 남편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고
예비 시어머니와의 통화에 큰소리가 잦아지는 듯 했다.
각박한 서울에서 집구하기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예비 시어머니께서 직접 집을 알아보시겠다며 케텍스를 타고 오셨는데
등산복에 운동화를 착용하신 모습에서 오늘은 결판을 내겠다는 어머니의 결의가 느껴졌다.
아침부터 부동산 아줌마와 맹렬히 집을 알아보신 후에 꼽은 베스트3를 남자와 함께 보러 갔다.
처음보러 간 집은 1층에 마트가 있는 주상복합의 아파트였는데 구름다리 같은 진입구조가 특이했는데
어머니는 안정감이 없어 집같은 느낌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두번째로 보러 간 집은 역근처의 30년 가까이 된 아파트였는데
그동안 본 집 중에 가장 넓었지만 복도식 1층이라는 점 때문에 보안이 걱정 되었고
이 집에 입주하는 순간부터 오늘은 수도가 고장나고 내일은 보일러가 고장날 것 같았다.
마지막 집을 보러 이동하는 차 안에서
창 밖을 바라보니 서울의 수많은 불빛이 아른거렸다.
나- 어머니, 이렇게 집이 많은데 왜 저희가 살 집은 없는 걸까요.
예비 시어머니- 그러게 말이다. 뿅뿅아, 내 말이 그 말이다.
마지막 집까지 둘러보고 예비 시어머니는 기차시간이 다 되어간다며
세 곳중 하나를 택할 것을 권하셨다.
남자는 이왕이면 신혼집인데 지하주차장도 있는 좀 깨끗한 곳에 살고 싶은 마음에 선뜻 정하지를 못했고
몇군데 충격적인 곳을 경험한 후에 기둥과 주벽만 있다면 건물이라 볼 수 있다는 체험적 증명을 마친 나는
비바람만 막을 수 있다면 어디든 좋다했다.
나- 어머니, 전 어디든 좋아요. 드라마처럼 인형집같은 곳에서 신혼을 시작하는 부부가 몇이나 되겠어요.
예비 시어머니- 그래 뿅뿅아. 오늘까지 고민해보고 내일은 꼭 정하렴.
신신당부를 하고 서둘러 케텍스를 타러 들어가는 어머니의 등이 왠지 작아보였다.
"오빠, 우리 어제 봤던 그 아파트로 하자. 그래도 교통도 제일 좋고 평수도 넓잖아.
오래된건 어차피 평생 살 집 아니니까 넘 신경 쓰지 말고"
남자는 아직 마음을 못 정한듯 했다.
그 오래된 아파트에 들어갈 거라면 내 돈을 들여서라도 부엌과 바닥을 다 뜯어내고 싶을 지경이라며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 이후부터 매일 끼고 살던 부동산114 어플이 담긴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남자- 저 내가 전부터 알아보던 집 중에 조금 동네가 멀긴한데 오늘 마침 전세물건이 나왔더라고 마지막으로 거기 한 번만 가볼래?
선뜻 따라나섰고 올림픽대로를 타고 서쪽으로 향하다 조금 구불구불 들어가는 듯했다.
남자가 말한 단지가 나타났고
나는 영화에서나 나오던
갓 뉴욕에 상경한 여자가 이리저리 최악의 집을 알아보다
-이 장면에는 이런 집이 렌트비가 ㅇㅇㅇㅇ달러나 한다고요? 하는 장면이 꼭 나온다-
마침내 경쾌한 음악이 울리며 거짓말처럼 마음에 쏙 드는 공간을 발견하고
'내가 살 곳은 이 집이야!' 하고 덜컥 계약하는 장면이 실제로 가능함을 깨달았다.
나를 맞이하는 초록색 가득한 조경과 깨끗한 단지 분위기. 넓은 지하주차장. BGM. 러브하우스에서 나오는 그 것 띠라라~
아니 우리가 그동안 보았던 퀘퀘했던 집들은 다 무언가 싶었다.
이제 집 안만 둘러보면 되지만 난 이미 안봐도 마음에 들어할 것을 알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보니 세들어 살고 있는 갓난 아기 엄마가 우릴 맞이했다.
큰 평수는 아니었지만 시원하게 나온 구조와 베란다 확장이 되어있는 덕분에 탁 트인 느낌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나- 오빠 이 집이야
남자- 근데 동네가 좀 구석지고 우리 생활권에서 약간 떨어진 감이 있는데 괜찮겠어? 대중교통도 그렇고.
나- 아니 느낌이 와 여기야
그렇게 그 집은 우리의 신혼집이 되었고
지금도 때때로 이 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곤 한다.
오늘도 살짝 열린 베란다창틈사이로 드는 바람이 코끝에 스치운다.
지금은 그 신혼집에서 근처로 이사와 다른 집에 살고 있지만
이렇게 어렵게 구했던 나의 첫 집은 나에게 아름답고 소중했던 공간으로 기억되었다.
당신의 집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