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R) 한 잔 어치의 조언
*본 소설은 허구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 학교, 학원이름, 인물 등은 실제사건과 관계 없습니다.
민재야, 이거라도 얼른 마시고 가.
오늘따라 늦게 일어난 민재에게 우유 한 컵 겨우 먹여서 등원시킨 지영은 늘 그렇듯 본인의 아침은 거른 채 정신없이 출근했다. 오늘은 9시부터 오전 회의가 있는 날, 중요한 업무분장이 이뤄질 것이다. 새로 시작될 프로젝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싶어 최 팀장에게 은근히 어필해놓았던 터라 기대감을 가지고 회의실 의자에 앉았다.
이번 프로젝트는 김 대리가 맡아서 한 번 해보도록 하고, 이거 보통 대리한테 맡기는 업무가 아닌데 특별히 기회 주는 거니까 멋지게 한번 해 봐.
'김 대리..?'
지영은 순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최팀장 쪽을 쳐다보았다. 최 팀장이 시선을 약간 돌려 과장들 틈 사이 뒷벽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이지영 과장, 박은실 과장 다 너무 서운하게들 생각하지 말아요. 다들 아무래도 애 키우느라 프로젝트에 올인 못 하는 거 알아서 내가 나름 배려한 거니까. 김 대리는 아직 결혼도 안 해서 이 프로젝트에 한 몸 바칠 수 있잖아, 응? 이제 연차 순으로 논공행상하는 시대는 지났잖아. 우리도 요즘 스타일로 젊은 청년 대리에게 파격적으로 한 번 밀어줘 봅시다.
명백한 성차별이다.
오늘따라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애매하게 말끝을 줄이는 최 팀장의 말투가 유독 거슬렸다. 말끝마다 혁신을 붙이는 최 팀장이지만 젠더개념에 있어서 만큼은 상꼰대다. 최 팀장은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자, 그럼 오늘도 열심히 하고 좋은 하루~우!
지영은 입사 당시 핵심부서로 당당히 공채 입사했었다. 살인적인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지영의 전공을 잘 살릴 수 있는 부서였기에 일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고과 역시 잘 나왔다. 하지만 민재를 낳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워라밸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어 여자가 다니기 좋다는 지금 부서로 자진해서 옮겼다. 옮긴 팀에서 하는 업무는 지영의 전공이 아니었기에 생소한 일들이었다. 이전 부서와는 다르게 옮긴 팀은 소위 끗발날리는 팀이 아닌 비주류였다. 하지만 어린 민재를 케어하기에 퇴근 시간이 일정해 수월한 게 사실이었기에 업무에서의 성취감은 조금은 우선순위에서 미뤄놓기로 했었다. 이제 민재가 10살이 되었기에 지영은 회사 일에도 의욕을 보이고 싶은 찰나였고 마침 팀에 잘 배정되지 않는 큰 프로젝트가 왔던 것이다. 업무시간에 컴퓨터로 감성 캠핑용품이나 검색하는 뺀질이 김 대리에게 중요한 기회를 뺏겼다는 것이 부아가 치밀었다.
이과장, 잠깐 커피타임 가능해요?
옆자리 박 과장이 말을 걸어왔다. 안 그래도 업무가 손에 안 잡히는 터에 오전까지 처리해줘야 할 메일이 잔뜩이었지만, 열심히 해서 뭐하나 싶어 박 과장을 따라나섰다.
지영씨, 애가 10살이라고 했죠?
네, 이번에 3학년 올라갔어요.
항상 회사 탕비실에서 카누를 타 마시는 박 과장이 웬일로 회사 앞 폴바셋으로 가잔다.
지영 씨가 이거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아이스크림 라떼를 두 잔 들고 온 박 과장이 한 잔을 지영 앞으로 밀어 놓았다.
지영이 스트레스받을 때면 점심시간에 종종 손에 들고 오던 것을 기억했던 모양이다.
'박 과장이 이렇게 눈썰미가 있던 사람이던가.'
아이스크림 라떼의 아이스크림을 약간 떠서 입에 넣었다.
'그래, 이 맛이지.'
지영의 눈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스르르 풀렸다. 아까 최 팀장을 향해 레이저를 쏠 때와는 다른 온화함이 담긴 눈빛이었다. 폴바셋 아이스크림 라떼 한 잔이면 X같은 회사생활도 버틸 인내심이 사흘은 연장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남이 사주는 거면 하루쯤 더 붙여 나흘로 연장해도 괜찮을 것 같다.
지영씨,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찬영이가 올해 8살이에요. 초등학교 막 입학했어요.
아, 찬영이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어요? 입학 축하해요. 미리 알았으면 학용품이라도 사줬을 텐데.
박 과장은 지영보다 나이도 5살 많고, 입사도 5년 빠르다. 하지만 육아로 인해 최 팀장의 눈 밖에 제대로 난 건지 고과도, 승진도 늘 밀려 이미 차장을 달고도 남았을 연차이지만 여전히 과장에 머물러 있다. 중요한 프로젝트는커녕 회사에 월급 받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다니는 모양새였다.
민재는 영유 나왔댔죠? 그럼 영어 엄청나게 잘하겠네요. 혹시 학원 어디 다니는지 물어봐도 되요?
...민재는 스파클 다녀요.
아유, 역시. 대단하네.
자식 교육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박 과장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약간 당황했다. 한편으론 내심 민재의 영어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터라 회사에 알아주는 사람이 생기나 싶어 내심 기분이 좋기도 했다.
찬영이는 아는지 모르겠지만 일반 유치원 다녔어요. 거기서도 일주일에 3번씩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영어를 했거든요. 학부모 상담 때 통화해보면 늘 즐겁게 한다고 잘하고 있다고 하길래 난 철석같이 믿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영어학원을 보내려고 알아봤는데, 그 뭐 레벨테스트? 난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뭐 반 배정을 위해서는 필요할 수 있겠지 싶어서 테스트를 받았어요. 그런데 학원에서 분반이 아니라 아예 받아줄 수 없다는 거예요. 들어갈 반이 없다나. 그래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다른 곳도 유명하다는 곳 두군데 더 가봤는데 전부 거절당했어요. 요즘 1학년들이 다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지 상상도 못 했어요. 나보고 이제까지 뭐했냐고 이미 늦었다나. 유치원에도 너무 배신감이 느껴지고 지금 제대로 멘붕상태에요. 민재는 8살에 영어 얼마나 했어요?
박 과장은 민재가 영유를 다닌 다는 사실을 3년 전부터 알았지만 한 달에 원비 얼마내는지 딱 한 번 물었을 뿐 별다른 교육 정보를 물은 적은 없었다. 월 200만원 가까이 한다던 대답을 들은 박 과장의 표정에는 놀람과 유난이라는 두 단어가 경계를 알 수 없게 엉켜있었다.결국 들인 돈과 노력은 이렇게 언젠간 티가 나게 된다. 지영은 웃고 있고 박 과장은 안달이 잔뜩 나있다.
몇 번 떠먹고 남은 아이스크림을 굵은 빨대로 휘저어 라떼와 섞으며 지영은 말을 이었다.
1학년 입학할 때 AR 6점 후반대 정도 였고 렉사일은 800 후반대 정도였어요. 고맘때 로알드달 시리즈 마틸다 같은 거 읽었던 거 같아요. who is 시리즈 읽었고요.
박과장은 핸드폰 메모장 켜 지영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박 과장님은 일유 보내시면서 엄마표 영어도 안하셨어요?
엄마표 영어, 들어는 봤죠. 사실 책도 한 권 사서 봤어요. 그런데 그건 전업이어야 가능할 거 같더라고요. 엄마를 갈아 넣어야 가능한 것 같아 엄두가 안 나던데요. 안 그래도 학원들에서 대놓고 이렇게 순진한 엄마는 처음봤다면 애 지금까지 안 시키고 뭐했느냐. 이미 늦었다고 해서 너무 충격받았어요. 지영씨는 워낙 야무져서 그런가 일하면서도 민재 교육 잘 시키는 거 같길래 좀 물어보려고 오늘 나오자고 했어요.
일유보낼 거면 영유 오후반을 따로 보내거나 적어도 집에서 집중 듣기 1시간, 흘려 듣기 2시간 이상의 노출은 매일 해왔어야 한다. 그런 기본적인 노력도 없이 언감생심 영어학원 레테에 합격할 생각을 했다니 박 과장의 순진함이 놀라웠다. 이러니 매번 승진에서 누락될 만도 하다.
박 과장님. 지금이라도 그럼 과외를 붙이세요. 내년에 4월 학원 스프라웃은 들어간다를 목표로 한다고 명확하게 제시하고 시작하세요. 지금부터라도 집듣, 흘듣 하루 못해도 두시간씩은 하시고요. 퇴근하고 나면 그날 들은 거 엄마 앞에서 낭독해보라고 하시고요. 영유 나온 애들하고 격차는 사실 이미 어쩔 수 없고요. 지금부터라도 빡세게 달려야죠 뭐.
그동안 지영이 동네 전업맘들에게 수십잔의 커피를 사가며 모은 교육 정보다. 그런 노력도 없이 고작 아이스크림 라떼 한 잔에 받아내려 하다니 지영은 상당히 언짢은 채 생각나는대로 조언을 뱉었다. 박 과장이 실제로 실천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지영의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초1에 벌써 과외를 시켜요?
쪽 빨아드린 아이스크림 라떼가 어느새 끝났다. 여긴 어째 갈수록 얼음만 많아지고 라떼 양은 적어지는 것 같다. 이왕이면 라지 사이즈로 시켜주지, 역시 박 과장은 언제나 한 끗이 아쉽다.
민재 유치원 다닐 때도 스피킹 처지는 애들은 영유 다니면서도 추가로 과외받고 그러더라고요. 3학년인 지금은 수학도 학원대로 다니고 과외 병행하는 애들 많아요.
지영의 이야기를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가며 듣던 박 과장은 늘 지갑대신 들고 다니는 자잘한 꽃무늬가 잔뜩 그려진 면 파우치를 오늘따라 유독 꼭 쥐었다. 지영의 조언이 도움이 되었을지 더 심란하게 만들었을지 알 수 없었다.
자리에 돌아와 보니 그사이 안 읽은 카톡이 1,375개가 쌓여 있었다. 카톡에서도 업무 이야기를 하면서부터 지영의 카카오톡 아이콘 우측 상단 빨간 동그라미 속 숫자는 1,000 이하로 줄어든 적이 없다. 밀린 업무 메일도 잔뜩인데 약간은 짜증스럽게 피씨 카톡 아이콘을 눌렀다. 파티션 너머 큼큼거리는 최 팀장의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분명 틱일 것 같은데 본인만 모르는 것 같다.
대화방 목록 제일 위에 새로운 단톡이 또 생겼다.
안녕하세요, 반 대표를 맡은 채윤 엄마 이현주입니다. 지원하는 분이 아무도 안 계셔서 선생님 부탁으로 회장 엄마가 반대표를 맡게 되었네요. 앞으로 1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총무를 맡게 된 아린맘 정연지입니다.아린이가 부회장을 해서 제가 총무를 하게 되었어요.
반가워요.
감사합니다
주르륵 이어진 반 엄마들의 형식적인 인사에 지영은 피로감을 느꼈다. 단톡에서 의미없는 엄마들의 ‘감사합니다’ 행렬은 좀 금지했으면 좋겠다. 올해 같은 반이 된 엄마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 싶어 대화방 우측 상단의 가로 삼선을 눌러 대화상대 목록을 보았다. 하준맘, 준서맘, 예서맘 쭉 이어지다가 아린맘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아린맘..?'
어디서 봤더라.
지영은 폰을 들어 인스타그램을 켰다. 검색창에 ‘아린맘’을 치자 제일 상단에 뉴욕식 엄마표 영어 아린맘이 떴다. 팔로워 1.4만.
미간에 힘을 줘 눈을 가늘게 뜨고 인스타그램 피드 속 사진과 카톡 프로필 사진을 비교해보기 시작했다. 피드 속 거실에 놓인 청록색 소파가 눈에 늘어왔다. 쨍한 컬러가 개그맨 박나래가 써서 유명하다는 헤세드 제품이 확실했다. 아린맘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몇 장 넘겨보니 같은 컬러의 소파에 민재 또래의 여자아이가 앉아 영어원서를 읽는 모습이었다. 같은 소파였다. 확실하다.
'세상에 같은 반에 유명 교육 인플루언서가 있다니.'
민재가 읽을 영어 리더스북을 사기 위해 검색하다 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영어원서는 종종 공구 계정에서 사는게 더 싼 경우가 있어서 늘 구매 전에 검색해본다.
요즘은 인플루언서가 마치 연예인과도 같다. 1.4만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닐지라도 지영이 직접적으로 아는 지인 중에는 가장 많은 숫자다. 인플루언서라니 왠지 쎈캐일 것 같아 좀 부담스럽기도 하면서도 채윤 엄마와는 또 다른 교육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을 것 같아 지영의 구미를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