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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수 Feb 04. 2022

나이가 든다는 것의 의미

'오래됨'과 '새로움'의 어우러짐

어느덧 2022년 새해도 벌써 2월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훈훈한 덕담을 나눈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10대 때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말이 전혀 와닿지 않았고 20대 때 중반이 되면서부터 그 빠름의 속도를 조금씩 느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러 어느덧 한 아이의 엄마인 30대 중반이 된 지금은 일 년 일 년이 어떻게 흐르는지 갈피도 못 잡을 정도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간다. 나보다 더 나이가 있으신 선배, 어른 분들의, "40대, 50대 되면 점점 더 빠르게 느껴져."라는 말씀이 이젠 더 이상 그냥 흘려 들여지지 않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엄마, 아빠 말씀만 들어도 시간은 체감상 더 빨리 지나갈 것이고 붙잡을 수도 없고 나이 듦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만 점점 더 또렷해진다.


문득 나이 드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겨 걱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란 물음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고 싶어 하더니 어른이 되니 다시 어린이가 되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


기억 속의 나는 어릴 적 엄청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어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수험 시절 막연히 대학생이 되면 하고 싶은 공부만 하며 친구들과 좀 더 자유롭게 놀 수 있겠지란 막연한 기대감에 이 시기를 얼른 보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막상 19세에서 20세가 되었을 때 이제 성인이 되었다는 기쁨보다는 나의 10대가 끝났다는 것의 아쉬움이 더 컸다. 대학교 이후부터는 하고 싶은 공부만 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은 이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도 덧붙이고 싶다.


지금도 어린이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 선택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어려지고 싶긴 하다. 수능시험은 이미 본 후인 대학생 때 정도면 딱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종종 했었다.




아무튼 어떤 시기에는 선망이 대상이 되기도 하는 '나이 듦'이 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로 위로받아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에게 계속 질문해도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결론에 이르지 않을 때는 책을 읽다가 반가운 문장을 만나기도 한다.

정승환 작가의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란 책에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란 문장을 발견했을 때 아! 하는 깨달음이 왔다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 최근에 읽은 델핀 생의 '오늘부터 돌봐드립니다'라는 책에도 나온다.


"노인을 높여 부르는 '노인장'이나 '노존'이라는 명칭도 있지만 나는 그냥 '노인'이라는 말이 좋다. 늙었다는 것이 욕은 아니니까. 나는 오히려 인생의 실을 풀다가 마지막에 이르렀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삶을 살았고, 사랑을 했고, 고생을 했다는 뜻이다. 용기 있었고, 비겁했고, 어리석었고, 사랑에 빠졌었다는 뜻이다. 틀린 적도 있고 많은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솔직히 말하는 게 잘못된 것일까?"


카퓌신은 원에서 인턴 요양사로 일을 배우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다. 카퓌신이 노인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태도와 가치관에서 '늙다', '늙어가다', '나이 들다' 등 각각의 말이 주는 어감 차이가 조금씩 있긴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연로하여 기운 없고 활기가 없는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다는 걸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이처럼 그만큼 많은 경험을 했고, 배웠고,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단점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세상은 계획한 대로 돌아가지 않고 한 번의 실패가 끝까지 실패인 것도 아니고 성공한 순간이 노력 없이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이처럼 익어가는 것이고 인생의 실을 꽤 많이 풀어 것이.




올해 초부터 마음에 쏙 들어와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이 생겼다. 유병욱 작가의 '없던 오늘'이란 책이다.

'판타스틱 듀오' 챕터에서 한창 꽃봉오리를 펴내려는 세대와 만개하여 여물어가는 열매를 만든 세대가 아름답게 조화하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감사한 일인지 느낄 수 있다.


"기존의 재능들이 앞으로의 재능을 발견하고, 사랑의 눈빛을 보내는 순간은 감동적이다. 재능에 나이가 어디 있나. 목소리에. 문장에. 연주에. 그 어디에 나이가 적혀 있나. 기존의 재능들 앞에 다음 세대가 나타나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은 아름답다."


"나이나 연륜 같은 단어 뒤에 숨지 않고, 어린 재능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나서는 어른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나는 최선을 다해 싸우는 ‘오래됨’과 ‘새로움’을 더 자주 봤으면 좋겠다."


얼마 전 마무리된 호주오픈 남자 테니스 경기에서 저자와 비슷한 마음을 느꼈다. 수년 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라파엘 나달과 그보다 10살 어린 작년 US오픈 남자 테니스 우승자인 다닐 메드베데프의 결승전 경기였다. 앞선 두 세트를 내리 지고서도 세네 번째 세트를 연달아 따내며 마지막 세트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노장의 저력을 봤다.


특별히 어떤 선수의 팬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둘 중에 누가 이겨도 괜찮았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둘 중 누굴 특별히 더 좋아하는 건 아닌데 이번엔 나달이 이겼으면 좋겠어. 그냥 다닐에게는 앞으로 시간과 기회가 더 많이 있을 텐데 나달은 운동선수로서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라며 '오래됨'을 응원했다.


아마 나도 이제 '새로움'보다는 '오래됨'에 가까워지고 있어서인지 괜스레 마음이 쓰였나 보다. 최선을 다해 싸우는 다닐과 나달의 경기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아름다움을 보았고 감동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오래됨으로 익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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